나를 그린 그림에는 시대와 삶이 들어 있다

입력 : 2023-11-02 15:34:54 수정 : 2023-11-02 15:4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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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의 심리학/윤현희

40점 가까운 자화상 남긴 고흐
프란시스 고야·프리다 칼로 등
서양화가 16인의 자화상 이야기

‘선술집의 탕아’와 ‘도살된 소’
렘브란트, 인생의 서사 담아내
“삶은 존재 의미 찾는 여정”

성스러운 붓자국의 노동이 묻어나는 고흐의 ‘화가로서의 자화상 ’(1887~1888). 문학사상 제공 성스러운 붓자국의 노동이 묻어나는 고흐의 ‘화가로서의 자화상 ’(1887~1888). 문학사상 제공
쓸쓸한 내면이 묻어나는 고흐의 ‘오슬로 자화상’(1889). 문학사상 제공 쓸쓸한 내면이 묻어나는 고흐의 ‘오슬로 자화상’(1889). 문학사상 제공

자화상에는 ‘인간’이 들어 있다. 시대와 삶의 아픔, 생의 혼돈, 사랑의 고뇌, 정신적 방황, 스러져 가는 육체와 그걸 수긍하는 체념, 그 모든 것들이 있다. 요컨대 ‘삶’이 들어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심리학>은 서양화가 16명의 자화상을 통해 인간과 삶을 이야기한다. 고흐(1853~1890)가 위대한 것은 귀를 잘라서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고행의 노동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눈 돌리지 않는 낮은 이들의 깊은 고뇌, 섬세한 고뇌를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고흐는 “사는 내내 노력과 일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우월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고흐의 자화상에는 ‘피가 도는 그 삶’의 얘기가 고통의 기록처럼, 정신적 출구를 향한 질주의 증거처럼 들어 있다. 고흐는 자화상을 40점 가까이 남겼는데 모델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을 찾아 렘브란트 자화상을 연구했다고 한다.

렘브란트(1606~1669)는 ‘인생의 서사’를 담은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다. 30세 무렵에 이미 성공했으나 이후 뜻밖에도 아내와 자식, 재산을 모두 잃는 인생 파산자로 전락했다. ‘선술집의 탕아’는 성공했을 때 술집에서 여자를 무릎에 앉히고 축배를 드는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50세 무렵에 그린 ‘도살된 소’는 푸줏간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를 통해 난도질당한 자신의 삶, 생의 폭력성을 처참하게 표현한 것이다. 삶은 뭔가. 그 폭력성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아프고 쓸쓸하나, 그것에 전적으로 함몰되지는 않는 인간 내면의 드라마가 있는 것이다. ‘쓴맛의 인생, 있는 그대로, 후회는 없다’. 그게 삶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는지.

모든 것을 이룬 시절의 렘브란트 모습이 담긴 ‘선술집의 탕아’(1635). 문학사상 제공 모든 것을 이룬 시절의 렘브란트 모습이 담긴 ‘선술집의 탕아’(1635). 문학사상 제공
‘삶은 도살된 저 고깃덩어리’라고 말하는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1655). 문학사상 제공 ‘삶은 도살된 저 고깃덩어리’라고 말하는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1655). 문학사상 제공
고통의 삶을 치르고 궁극으로 돌아온 모습을 표현한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담긴 ‘돌아온 탕아’(1665). 문학사상 제공 고통의 삶을 치르고 궁극으로 돌아온 모습을 표현한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담긴 ‘돌아온 탕아’(1665). 문학사상 제공
있는 그대로, 후회는 없다는 수긍의 만년에 이른 렘브란트의 ‘자화상’(1669). 문학사상 제공 있는 그대로, 후회는 없다는 수긍의 만년에 이른 렘브란트의 ‘자화상’(1669). 문학사상 제공

프란시스 고야(1746~1828)는 인간성의 어두운 그림자를 봤던 이다. 39세 때 자화상은 자신을 고상하게 그리지 않고, 침울한 기운이 스치도록 그렸다. 69세 때 멍한 모습의 ‘자화상’은 청각을 상실한 이후 삶의 피로감 불안감이 묻어난다. 삶은 살 가치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의 희번덕이는 눈은 스스로에게 경악하는 듯한 눈인데, 전쟁의 폭력과 야만의 시대를 목도한 고야가 인간에 대한 혐오와 깊은 허무를 표현한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북유럽 르네상스를 전개한 꽃미남 화가였다. 젊은 시절 그의 자화상은 빛이 난다. 하지만 삶은 빛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47세에 그린 ‘누드 자화상’은 부은 눈에다가 짙은 병색과 불안이 묻어나는, 시간 앞에서 좌절해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죽기 6년 전에 그린 ‘비탄의 남자로 그려진 자화상’은 늘어진 뱃가죽과 숭숭한 머리털의 허허한 모습이다. 한때 찬란함을 품었던 얼굴과 눈빛, 이제는 공허하다.

프리다 칼로가 숨진 그해에 그린 자화상 같은 작품 ‘인생이여 만세!’(1954). 문학사상 제공 프리다 칼로가 숨진 그해에 그린 자화상 같은 작품 ‘인생이여 만세!’(1954). 문학사상 제공

프리다 칼로(1907~1954)는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그는 18세 때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30번이 넘는 수술을 반복했고, 최후에는 괴저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21살 많은 화가 리베라와의 파고 높은 애증의 삶, 이혼과 재결합은 창작의 근원인 동시에 고통의 근원이었다. 프리다는 그 고통을 승화시킨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찢어진 심장도 그렸고, 유산의 고통을 피범벅과 눈물로 그렸고, 철제 코르셋과 인공기둥에 의지한 육체에 꽂힌 무수한 못의 고통을 그대로 그렸다. 그는 그 고통을 직시했기에 그 모든 것을 껴안는 ‘…사랑의 포옹’이란 신화적인 자화상을 그렸다. 47세로 숨진 그의 마지막 외침은 ‘인생이여 만세!’였다.

자화상들은 “고통 없이는 제대로 된 삶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고통 슬픔 나아가 치욕마저도 삶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그게 삶과 인간의 비밀이다. 책은 위풍당당한 자아, 성스러운 긍정의 자아, 고통받는 내면의 자아, 라는 이름으로 카라바조 쿠르베 뭉크 실레 안귀솔라 벨라스케스 젠틸레스키 마티스 부르주아 등의 내면이 담긴 작품을 불러내고 있다. “삶은 여기 이곳에 존재해야만 하는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한다. 저자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심리학자다. 윤현희 지음/문학사상/376쪽/2만 2000원.

<자화상의 심리학>. 문학사상 제공 <자화상의 심리학>. 문학사상 제공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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