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유라시아 영화제와 편식

입력 : 2024-01-08 17:5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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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혁 유라시아교육원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
국가·지자체 대외 정책 편중 심각
오랜 인연의 북방 대륙 멀리 하고
미국·일본 등에 지나치게 기울어

러시아, 한국 ‘비우호 국가’ 지정
자동차·가전 부문 등 피해 현실화
세계박람회 실패 교훈 되새겨야

지난 연말 부산 해운대의 ‘영화의 전당’에서 ‘유라시아 영화제’가 열렸다. 동슬라브권, 중앙아시아, 코카서스에서 두 편씩, 모두 여섯 편의 영화가 출품되어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일반 대중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없는 북방 유라시아 대륙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영화 '척과 헉의 모험'은 아버지를 찾아서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신비로운 푸른 산맥으로 여행을 떠나는 두 소년의 꿈을 광활한 설원을 배경으로 보여주었다. 키르기스스탄의 '쑥의 향기'는 짝사랑의 황홀함과 엄마의 죽음을 대비하여 보여준 '성장 소설'이었다. 카자흐스탄은 1990년대의 소련 탈출 붐을 배경으로, 탱크를 훔쳐 독일로 도망간 어느 곡예사와 탱크 병의 모험이라는 이색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휘말려있는 벨라루스는 1921년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국경 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부산 팬들에게 소개했다. 코카서스의 조지아는 국민 화가 피로스마니의 삶과 예술을 출품했는데, 연극 공연장이나 그림 전시회에 온 듯이 관객을 화면 안으로 끌어들였다.

필자는 북방 유라시아 역사·문화 소개 강연을 마치고 청중과 함께 아제르바이잔 영화를 관람했다. ‘과거에서 온 편지’라는 이 영화는 예상을 아주 많이 빗나가게 했다. 영화 홍보물엔 1941년 스탈린 시절에 당한 아제르바이잔 내 독일계 주민들의 강제 이주를 다룬 작품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물이 아니라 철학적 주제의 영화였다. 삶과 기억의 문제, 기억과 용서, 누구나 품고 있는 존재로서의 한계 등에 천착한 게 아닌가 싶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편식은 나쁘다. 편식은 몸에 필요한 여러 다른 영양소들을 결핍하게 하고, 면역력 부족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엔 몸만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성격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문화 편식도 나쁘긴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할리우드식의 상업영화와 블록버스터에 완전히 포위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영화제는 반가웠고, 이런 변화를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다른 대륙의 영화예술로 확대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가 외교와 지자체 정책 등에도 그런 현상은 없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편중도 편식이다. 현 정부 들어서 벌어지는 여러 국제협력 관계를 보면, 오랜 세월 우리와 정치·경제·문화·역사적으로 삶이 서로 얽혀온 북방 대륙을 아예 버리고 마치 해양국가라도 되려는 양 나서는 형국이 아닌가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전쟁만 해도 그렇다. 한쪽을 노골적으로 버리고 미국 편을 지나치게 들다가 러시아로부터 ‘비우호 국가’로 지정되어 버렸다. 러시아 정부가 2022년 3월 7일 우리를 ‘비우호 국가’ 44개국 명단에 포함했고, 지금까지 그 족쇄를 풀어 주지 않고 있다.

균형추를 잃어버린 이런 외교정책 때문에 러시아 내 판매 1위를 달리던 현대자동차는 5400억 원을 들여 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지난 연말에 단돈 1만 루블(14만 원)에 러시아 정부에 사실상 빼앗겨 버렸다. 이미 가동이 중단된 모스크바 근교의 삼성과 LG 가전 공장도 언제 러시아나 중국에 뺏길지 모른다.

지자체에서도 정책의 편중성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수천억 원의 예산을 쏟는 등 왜 영어에만 그렇게 목을 매는지 모를 일이다. ‘영어 상용 도시’를 ‘영어 하기 편한 도시’로 이름만 바꾼다고 뭐가 달라질까. 부산이 처한 지금의 다중문화 현실에 맞지 않다. 그런데도 부산시는 전국에서 성공 사례를 찾기 어려운 그 ‘영어 마을 세우기’ 정책을 고집하고, 심지어는 3~5세 어린이까지 영어 교육을 확대하겠고 한다. 명지산업단지에 2027년에 들어선다는 어느 영국 귀족학교에 시 부지를 공짜로 대 준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 삶은 동서로 남북으로 계속 확장되고 다변화되는데, 학교에서의 외국어 교육도 편중이 심하다. 영어·일본어·중국어뿐이다.

몇 년 전까지도 그렇지 않았는데, 국제고와 외고 등 특목고에서도 러시아어를 없애 버렸다. 현재 부울경 지역에서 미래 세대가 러시아어와 지역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은 울산외고가 유일하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전에서 그렇게 실패하고도 정책 당국자들은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나 보다. 부산은 해당 유치전에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를 뺀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유럽, 발칸반도, 코카서스, 발트 3국 등 북방 유라시아권에서 단 한 표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전쟁은 머지않아 잦아들 것이고, 천문학적인 우크라이나 복구 시장이 우리 앞에 곧 다가올 것이다. 그렇지만 부산의 대비와 준비 태세는 깜깜한 암흑 그 자체다. 계속 이대로 갈 것인지, 이대로 가도 걱정이 안 되는지, 이 글을 읽을 높은 분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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