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29번의 경미한 사고와 300번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 법칙. 지난달 부산도시철도 1호선 방화미수 사건은 대형 참사를 경고하는 신호였다. 부족한 치안 인력, 경찰 연계 시스템 공백, 긴급상황 대응 매뉴얼 미비 등의 고질적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홀로 역 지키는 역무원
지난달 9일 방화미수범을 태운 열차가 명륜역에 도착했을 때 역무원 1명이 열차 내로 투입됐다. 역무원 2인 1조로 근무하는 명륜역은 당시 점심 시간이어서 1명만이 현장에 출동할 수 있었다. 당시 역무원은 역무실 문도 잠그지 못하고 경광봉만 겨우 챙겨 급하게 열차로 뛰어갔다. 뒤이어 기관사도 현장에 왔지만, 역무원과 기관사 모두 사법권이 없어 몸 수색이나 방화미수범을 강제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폭언을 쏟아부으며 주변을 위협하는 방화미수범에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하차해달라”는 안내였다.
저지에 나선 인력이 더 많았다면 방화미수범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었지만, 취약시간대엔 역무원 1명이 역을 지키는 게 현실이다. 부산도시철도의 총 108개 역 중 유동인구가 많은 41개의 관리·독립역은 역무원 4~5명이 일하고, 나머지 60여 개의 산하역은 2인 1조로 근무한다. 절반 이상이 2인 1조 근무인데, 점심시간 등 취약 시간에는 혼자 역을 지켜야 한다. 부산교통공사가 지난해 9월 수립한 ‘열차 내 질서 저해자 대응 절차 개선계획’에 따르면 종합관제소 지시로 현장출동을 할 경우 역무원은 2인 이상으로 출동해야 한다. 최소한의 대응 인력을 지킬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지하철 경찰팀과 교통공사 간 돌발 상황 발생을 공유할 ‘핫라인’ 체계는 아예 없다. 경찰 측은 낮 12시 36분께 현장에 출동한 역무원으로부터 최초 신고를 접수했다고 밝혔다. 부산교통공사 콜센터와 부산대역 역무실에 승객의 신고가 들어온 지 6분 가량 지난 시점이다.
방화미수범을 태운 열차가 지나친 온천장역에는 기동순찰대 지하철경찰팀 출장소가 있었지만 근무 경찰은 없었다. 부산경찰청은 “원래 기동순찰대는 주중에 근무하는 부서로, 부산청에서는 특별히 지역 행사가 있을 때 주말에도 기동순찰대를 배치한다”며 “사건 당시에는 해운대, 광안리, 남포동에서 근무하던 기동순찰대가 오후 1시 57분 상황실의 연락을 받고 1호선 라인 전역에 2명씩 배치됐다”고 말했다.
동래역에서 범인이 하차한 뒤 12시 40분께 동래경찰서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기동순찰대는 오후 1시 57분 용의자 수색에 투입됐다.
■정시운행 강박과 애매한 판단 체계
전문가는 당시 명륜역에서 상황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운행을 이어간 것이 가장 위험한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동의대 류상일 소방방재행정학과 교수는 “방화미수범이 주머니에 시너 등 위험 물질을 소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며 “시민들이 불편하더라도 철도를 멈춰 세우고 방화범을 제지하고 운행을 재개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부산교통공사는 방화미수범을 태운 열차가 명륜역에서 운행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병력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동래역이 명륜역보다 역무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차가 동래역에 도착했을 때 교통공사가 ‘병력’이라고 칭한 동래역 역무원과 경찰은 범인 도주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서 열차 정차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가 모호한 것도 문제로 꼽힌다. 열차의 정차 여부는 관제에서 결정해야 하지만, 개별 열차 내 CCTV는 기관사만 확인할 수 있어 현장 보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역무원들은 “정차는 관제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지만, 일부 관계자는 “현장에서 판단을 잘 해야 한다”고 말했다. 추후 책임 소재를 따지거나 정시운행 중심의 문화 속에 누구도 정차 판단을 쉽사리 내리지 못하다가 ‘골든 타임’을 놓칠 수도 있다.
재난 대응 매뉴얼부터 손을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토부의 철도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에서는 열차 충돌, 탈선, 화재, 폭발 등을 사고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고 최근 인파 관리가 추가됐다. 흉기 난동이나 방화 등 열차 안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은 위기 사례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부산교통공사는 법정 매뉴얼과 별개로 흉기 난동, 방화 등 긴급 상황에 대한 대응 절차를 정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정작 이번 사건처럼 실제 긴급상황이 펼쳐졌을 땐 막상 열차를 멈춰세우지 못했다.
부산지하철노조 이동익 역무지부장은 “대형 재난 위주로 매뉴얼이 있고 이번 같은 상황에 직접 적용할 만한 매뉴얼은 없다고 봐야 한다. 난동을 부리는 민원인에 대해서도 친절 서비스교육 정도가 전부”라며 “정시운행 강박이 있고 인력은 부족하다. 명확한 업무 범위 구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산교통공사 관계자는 “테러·방화·응급환자 발생·흉기 난동 등 중대한 사고라고 판단했을 때,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열차를 정차해서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침에 강조하는 등 보완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