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경남 밀양에서 일어났던 집단 성폭력 사건을 두고, 2024년 밀양시에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 무려 20년 만의 일이다. 일명 ‘사이버렉카’라 불리는 일부 유튜버들이 ‘정의구현’을 빙자하여 피해자 동의도 없이 무분별한 신상과 정보를 공개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온 국민이 관심을 갖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던 당시의 가해자들과 경찰, 검찰, 법원, 지역사회를 비판하고 피해자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20년 만에 비로소 상식을 되찾은 기분이다. 피해자를 지원했던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피해자는 국민의 응원과 관심에 감사드리고, 잠깐 타올랐다가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경찰과 검찰에게 2차 피해를 겪는 또 다른 피해자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피해자에게 응답하고 가해자를 제대로 ‘응징’함과 동시에, 진짜 우리가 돌아봐야 할 부분은 우리 사회가 왜 불과 20년 전에는 이토록 우리 상식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과 성 의식이 그만큼 진일보했음을 보여 주는 지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피해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로 인정받기까지의 지난한 역사이며, 동시에 폭력과 착취 앞에서 그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해 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성찰을 필요로 한다.
밀양 집단 성폭력 20년 만에 재조명
범죄 책임 피해자에 전가해 온 역사
성범죄 왜곡된 사회 인식 현재진행형
가해자 사과·제대로 된 처벌도 중요
범죄 피해 회복 공동체 역할 절대적
당당한 일상 복귀 전 사회가 응원해야
1997년에 일어났던 소위 ‘빨간 마후라’로 알려진 10대 청소년 성 착취 사건은 2020년 텔레그램 성 착취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비로소 제대로 조명되었다. 집단 성폭력과, 성 착취 영상 촬영에 무단 유포까지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오히려 피해자는 ‘음란한 영상을 함께 제작했다’는 이유로 함께 소년법상 보호처분을 받았다. 10대 청소년 피해자를 오히려 ‘발랑 까진’ 비행 청소년으로 보는 시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도 마찬가지였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이후 아동 청소년 성 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성 착취 피해 청소년은 비로소 소년법상 보호처분의 대상이 되는 ‘대상 청소년’에서 제외되었고, 비로소 피해자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한 사회에서 이런 변화가 가능하기까지는 여러 전제가 필요하다. 우선 피해의 경험이 발화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사회가 비로소 그 용기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피해자의 지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피해자 자신이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지속적인 도움과 지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겪으며 삶이 중첩적으로 취약해지는 여정을 살아가는 청소년 피해자가 지금도 많다고 말한다. 삶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하고, 취약성이 굴레가 되지 않으려면 사회적, 관계적 자원과 인식이 힘 있게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려면 그를 피해자로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 자기 삶을 존중받으며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회가 피해를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피해 사실 자체로 객관적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피해자는 피해의 경험 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성신문〉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집단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77%는 여전히 집행유예로 관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피해자의 용기 있는 발화와 신고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무수한 사건들 속에서 가해자에게는 관대한 한편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피해를 온전히 피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례들을 우리는 여전히 목격하고 있다. 특히 성 착취 피해를 인정받는 사례는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손가락질과 불인정, 무관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자신도 피해의 경험을 발화하지 못하는 무수한 성폭력, 성 착취 피해자들이 있다.
수십 년 뒤의 미래에 또다시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가 하고 과거의 몰상식을 비통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피해자를 어떻게 대우하는가는 그 사회의 수준과 품격을 보여준다. 이상적인 사회는 피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가해자는 사과와 더불어 처벌을 받고, 피해자는 피해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당당하게 복귀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 싸움을 아직 피해자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밀양 성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의 말처럼, 불꽃이 타올랐다가 쉽게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