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손님

입력 : 2024-07-25 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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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성 수필가

아마, 내 곁의 세사도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듯,
모든 인연이 만든 얽매임도
그렇게 바라볼 것입니다
그도 잠시 나를 찾아온 손님일 테니.

몇 달간 집을 비운 사이에도 세월은 어김없이 집을 다녀갔습니다. 목단꽃 봉오리에는 꽃 대신 투박한 씨앗이 달렸고,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기를 기대했던 능소화는, 그런 나의 바람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벌써 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단의 꽃들은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화단을 방문하는 손님들이었습니다.

능소화는 늙어 가는 사람처럼 조금씩 짓무르고 있었고, 어떤 송이는 벌써 땅에 떨어져 처연한 모습으로 썩고 있었습니다. 능소화는 7월의 불꽃 같은 햇살과 경쟁이라도 하듯, 주황색 화려한 옷을 입고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으므로, 매사에 자신이 없는 나는 그 오만스러운 몸짓조차 마음에 들었습니다. 능소화는 한여름의 짧은 일생을 살다 가지만, 자신의 아름다움에 너무도 흡족하여, 그런 지극한 만족감으로 일생을 살아내는지, 질 때는 단 한 가닥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정말 미련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는 몸짓으로 그냥 “툭” 떨어집니다. 나도 저렇게 헌 옷 한 벌 벗어 던져 버리듯 떠날 수 있을까? 떠나는 날 붙잡을 한(恨) 같은 것은 없을까?

달빛 아래서 세레나데를 부르던 안타까운 젊음이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불면으로 새던 밤도 있었습니다. 가족들과의 영원한 이별, 뼈저린 회한(悔恨), 그것들은 곱고, 슬프고, 밉고, 분노한 모습으로 내 마음에 살면서 나를 끌고 다녔습니다. 나는 애증(愛憎)에 사로잡힌 포로였고, 그것들을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그것들이 내 삶의 실제 내용물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인 사실이 없었습니다. 하나하나에 대하여 갈증과 증오라는 원망의 이름을 달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나의 초대나 허락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내 마음에 차고 들어와,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짓밟고 괴롭히는, 불청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은 내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들 전부, 이 화단에 소리 없이 찾아왔다 떠나는 온갖 꽃들처럼, 내 삶에 찾아온 손님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저 능소화처럼 거만을 떨고, 어떤 것은 제비꽃처럼 슬프고, 어떤 것은 독초처럼 아프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전부 내 마음에서 피었다 지는,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꽃들이었고, 그 꽃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텅 빈 쭉정이이었을 것입니다.

고운 것은 고운 것대로, 추한 것은 추한 것대로,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대로, 아픈 것은 아픈 것대로, 그것들은 전부 나를 찾아온 손님들이었고, 그것들이 나를 찾아온 것에는, 내가 모르는 어떤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와 형제들을 가족으로 초대하여 서로에게 귀한 손님이 되었습니다. 꽃들이 화단에서 이슬과 햇살을 공유하듯, 우리는 한 공간, 같은 시간대를 공유한 세상의 손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두 손님이었던 까닭에, 그들의 예정된 시간에 따라, 나의 헤어질 준비 같은 것은 헤아리지 않고 그렇게 내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가슴 떨리던 젊은 날의 환희, 사랑의 상실이 가져온 아픔도, 모두 세월 따라 나를 찾아와 잠시 머물다 간 손님들이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손님들-그리움과 외로움, 늙음에 대한 분노-도 때가 되면 떠나겠다고 손을 내밀 것입니다. 손님은 자기가 가야 할 때는, 아무리 붙잡아도 뿌리치고 홀연히 떠나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연초록 그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이고, 자취 없이 사라지는 봄날 훈풍처럼 말입니다.

아마, 내 곁의 세사(世事)도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이제 나는, 화단의 꽃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듯, 모든 인연이 만든 얽매임도 그렇게 바라볼 것입니다. 그도 잠시 나를 찾아온 손님일 테니, 그냥 태연히 맞았다가 애쓰지 않고 보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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