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표' 매년 수천 매씩 사들인 공공기관

입력 : 2024-09-11 19:20:00 수정 : 2024-09-12 16: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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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도 쉽게 타는 ‘신의 직장’
한전, 매년 2만 3000석 사전 구매
남부발전·주금공·예결원·캠코 등
부산 이전 기관도 수천 석씩 계약
직원 안 쓰면 빈 좌석… 시민 피해
기보·KRX 등 실비 지원과도 대비

11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 매표 창구에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 등 열차 이용객들이 표를 구입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11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 매표 창구에서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 등 열차 이용객들이 표를 구입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지역 이전 공공기관·공기업이 일반인과 다른 방식으로 KTX를 이용하는 문제의 핵심은 공공재인 KTX 예매 공정성 훼손, 지역 정착 의지 부족으로 요약된다. 시민들은 KTX 출발 전까지 표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공공기관 직원들은 사전에 기관이 사둔 표로 손 쉽게 표를 구하는 불공정이 매 주말마다 벌어지고 있다.

지역 정주를 장려해야하는 이전 공공기관에서 직원들의 서울행을 KTX 사전 예매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공공기관 지역 이전 정책의 근간을 흔든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부산에서만 매주 200석 선점

11일 〈부산일보〉 취재진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김도읍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공공기관 KTX 사전 계약 현황에 따르면, 서울행 KTX를 사전 예매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은 한국전력이다. 2015년부터 좌석 선예약을 시작한 한전은 지난해 기준으로 본사가 있는 나주에서 서울까지 나주역~용산역 구간 2만 3000장의 표를 연간 단위로 사전 구매했다. 2022년은 2만 1000석, 2021년 1만 7000석을 샀다.

2016년 경주에 본사를 이전한 한국수력원자력은 서울행 2편, 경주행 2편씩 총 4편에 3000석을 확보해 직원들에게 제공했다. 대구에 본사가 있는 신용보증기금은 매년 4000석 규모로 왕복 각각 1편씩을 이용하고 있다.

부산 이전 공공기관들 중 주택금융공사는 부산과 서울을 왕복하는 총 5편의 KTX 4000석을 사전에 계약했다. 예탁결제원은 서울행, 부산행 총 3편을 3000석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역시 3편 3000석 규모를 사전에 확보했다.

주 단위로 환산해 보면 부산역 출발 서울행 KTX의 200여 석이 사전 공공기관 예매분으로 빠진다. 남부발전의 경우는 KTX 왕복 3편에 더해 SRT까지 사전 계약을 통해 지원한다. SRT는 부산역 출발 서울행 열차 수가 매우 적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일주일 전에는 절대 구할 수 없는 표’로 악명이 높다.

■피크 타임 집중·빈 자리도 취소 없어

이들 기관이 사전 예약한 표들의 시간대는 대부분 주말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인파가 몰리는 ‘피크 타임’에 집중된다. 대부분의 기관이 금요일 오후 5~7시 서울행과 일요일 오후 6~8시 부산행 시간대를 선점하고 있다.

남부발전은 금요일 오후 4시 36분 부산을 출발하는 KTX, 오후 4시 40분 수서행 SRT 총 42석을 매주 지원한다. 주택금융공사는 금요일 오후 5시, 오후 6시 출발 KTX와 일요일 서울 출발 오후 7~8시 KTX, 월요일 오전 6시 서울 출발 KTX에 열차 편당 30~50석씩 지원하고 있다.

지난 3일 취재진이 이들 기관이 선점한 KTX 8편의 주말(7~9일) 좌석 현황을 확인한 결과 6편의 KTX가 이미 매진 돼 있었다. 2편의 KTX는 잔여 좌석이 10석 미만이었다. 8개 기관 직원들의 경우 대부분 금요일 출발 기준으로 수요일 오후까지 자체 시스템으로 사전에 확보된 표 예매가 가능하다.

이들 기관이 빈 자리에 대해 별도 예매 취소 절차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코레일은 공공기관·공기업의 계약에서는 별도 표 취소에 대한 위약금을 물지 않고 있다. 코레일은 기관에 연간 단위로 표 수천 장을 팔고 이후 탑승 현황 등을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관들이 확보한 표보다 직원 탑승이 적으면 일부 좌석은 빈 좌석으로 운영된다. 코레일 입장에서는 빈 좌석 비용을 기관에게 받아 수익 보전에 문제는 없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예산 부족 등으로 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이 같은 방식의 운영은 방만한 경영의 단면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 부처도 폐지, 실비 지원 기관도

모든 지역 이전 기관이 KTX 특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부산에 본사를 둔 한국거래소는 서울에 주소를 둔 부산 근무자가 서울로 귀가할 경우 이용 교통편에 따라 일부 경비를 실비 지원한다. 기술보증기금도 복지 차원에서 근무지 이외 지역에 주소를 둔 지역의 이동 거리를 산정해 교통비를 제공한다. 같은 시기 이전한 기관들이 비용 보전 형식의 직원 복지 제도를 하고 있는 것에 비춰 보면 이들 기관의 사전 예매가 과도한 복지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2013년부터 정부는 세종시에 근무하는 중앙 부처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서울을 오가는 기차 일부를 선예약해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무원 특혜 논란이 일어 지난해 폐지됐다.

부산경실련 도한영 사무처장은 “직원들의 정주를 장려하고 지역과 상생하는 방안을 이전 공공기관이 고민해야하는데, 직원 복지 차원을 넘어 일반 시민의 예매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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