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의 현대 산문 혁신가”

입력 : 2024-10-13 15:06:38 수정 : 2024-10-13 17: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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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의미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 수상
남성 중심 부조리 문제의식
“날마다 주검 잔치는 무슨…“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한국의 한강이었다. 유명 베팅사이트가 유력하게 꼽은 중국의 찬쉐나, 단골 후보인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니었다. 한강은 수상 예상자 명단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국의 작가 한강을 선정하면서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국 작가 최초 수상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가 최초로 수상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림원은 이어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정면으로 맞서며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간의 연결에 대해 독특한 인식을 지니며,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가 됐다”라고 부연했다.

한강을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은 <채식주의자>다. 2007년에 출간되어 3만 부 판매에 그쳤으나 2016년 맨부커상 수상 이후 사흘 만에 32만 부 판매를 기록했다. 이 소설은 아름다운 산문과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내용의 조합이 독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한강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보편적 주제에 몰입해 언어와 소재의 한계로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 문학을 세계 문학의 주류로 편입시키는 쾌거를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강 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현대사의 참혹했던 순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큰 역할을 한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계엄군에 맞서다 죽음을 맞은 중학생과 주변 인물의 참혹한 운명을 그렸다. 한강의 작품을 번역 출간한 영국 출판사 헤이미시 해밀턴의 사이먼 프로서 출판디렉터는 “한강은 잔인한 행위와 사랑의 행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종(species)인 인간이란 존재가 과연 어떤 의미인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에 흔들리지 않고 맞선다”라고 소개했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뒤 <소년이 온다>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여성 수상자 수가 적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수상자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2021년에 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한강은 이 소설로 2023년에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인 ‘메디치 문학상’ 외국문학상을 수상하며 남성중심주의가 가져온 인간의 부조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에서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현대 문학의 대부분은 여성 작가에 의해 쓰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미디어와 문학계는 나이 든 남성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 작가인 한강이 한국 문학의 노벨상 가뭄을 끝낸 것은 즐거운 놀라움이자 시적 정의”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러시아 문학 평론가 나탈리야 로미키나도 <포브스 러시아>에 “한강 산문의 특징은 매우 끔찍한 일을 은유적으로, 매우 시적으로 쓴다는 것이다. 노벨 위원회가 한국 작가에게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면서 첫째로 여성에게, 둘째로 시인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경향인 시인의 산문을 강조한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정부와 민간의 체계적인 번역 지원이 더해지면서 한국 문학이 안정적 성장기에 진입했기 때문에 수상이 가능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문학번역원은 “한국 문학을 꾸준히 해외에 소개해 온 노력의 결실이자, 한국 문학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말했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은 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18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76종의 책으로 출간됐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한 국내 기자회견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당초 한강의 작품들을 출간한 세 출판사인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는 노벨상 기념 국내 합동 기자회견 개최를 조율해 왔으나 작가가 고사해 최종적으로 회견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한강 작가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은 앞서 기자들을 만나 “딸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 기자회견을 안 하기로 했다더라”라고 밝힌 바 있다.

대신 한강 작가는 출판사들을 통해 언론에 전한 문자메시지에서 “수상 소식을 알리는 연락을 처음 받고는 놀랐고, 전화를 끊고 나자 천천히 현실감과 감동이 느껴졌다. 하루 동안 거대한 파도처럼 따뜻한 축하의 마음들이 전해져 온 것도 저를 놀라게 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라고 밝혔다. 보다 자세한 그의 수상 소감은 12월의 노벨상 시상식에서 낭독되는 수락 연설문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한편 한강 작가는 2016년 <채식주의자>로 부커상을 수상한 뒤 국내 기자회견에선 다음과 같은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 소설만 읽으시지 말고 제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동료 선후배 작가들이 많은데, 조용히 묵묵하게 방에서 자신의 글을 쓰시는 분들의 훌륭한 작품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한강이 한국 작가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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