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밤의 고요함을 좋아한다. 그것도 분주했던 일상의 기운이 가라앉은 깊은 밤을 좋아한다. 나에게 밤은 하루의 마무리가 아니다. 먼지 낀 아스팔트에서 호젓한 오솔길로 접어드는 순간이다. 그래서 뒤늦게 뭔가를 쓰겠다며 지금처럼 꾸물대며 시간을 보낸다. 한마디로 저녁형 인간이다. 그 때문인지 아침엔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내 관점으로 아침형 인간은 신기한 종족이다. 나와 함께 사는 이는 새벽 5시 전에 일어난다. 굳이 그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데 항상 이른 시간에 깨어난다. 어찌 그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한번은 아침형 인간이자 가끔 나를 외계인 취급하는 아내에게 물어봤다. 아내는 새벽의 고요함이 좋다고 대답했다. 그냥 눈이 떠지고, 눈이 떠지면 누워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새벽의 고요함? 한밤의 고요함과 많이 다른가?
아무튼, 고요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눈이 떠진다는 건 신비한 현상이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도 비몽사몽으로 한참을 꿈틀대고 있으니 말이다. 자책까지는 하지 않는다. 잠을 자는 사람은 계속 자려고 하고, 깨어 있는 사람은 계속 깨어 있으려 한다는, 잠의 관성 법칙이 있다는 것을 본 적 있기 때문이다.
한데, 잠은 왜 자야 할까? 삶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있어야 하는 셈이다. 게다가 잠을 못 자는 것이 음식을 못 먹는 것보다 더 치명적으로 작용해 사망하기까지 한다. 이만큼 대단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잠을 자야 할 중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명확한 결론은 없지만 여러 가설이 있다. 뇌와 신체의 휴식이라는 설이 있고, 노폐물을 제거함과 동시에 기억의 찌꺼기를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다. 그 외에도 많다. 한데, 휴식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는 주장엔 솔직히 100% 수긍이 안 된다. 심장은 평생을 쉬지 않는다. 잠잘 때라도 쉬지 않고 뛰고 있지 않은가.
나는 기억과 관련한 어떤 과정이라는 가설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기억은 생명체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지 않은가. 즉, 기억은 생명체만이 가진 유일한 능력이며 진화의 토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데, 기억을 남겨 둘 방법이 없다. 대부분 동물은 기록할 문자조차 없으며, 인간조차도 그 기록을 후대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엉뚱한 가설을 세웠다. 물론 나만의 가설이다. 생명체는 살아 있는 동안의 기억을 몸 안에 저장하기 위해서 잠을 잔다. 그 몸이라는 것이, 유전자일 수도 있고 혹은, 차원조차 다른 특별한 곳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잠을 자는 생명체는 그 자체로 기억을 생성하는 창조자이자 기억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각인된 기억은 대를 이어 전승된다.
제왕나비는 때가 되면 월동하는 장소를 찾아 대륙을 넘어 날아간다. 자신의 기억이 아닌 수만 년간 누적된 조상의 기억에 따라서이다. 본능, 본성이라 부르기도 하는 그것에 따라 기러기는 수천 킬로를 이동하고, 인간은 불가능에 도전한다. 그럴듯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지금 내 기억은 후대의 재능, 열정이 되고 호기심이 될 것이다. 한데, 후대를 변모시킬 내 기억이 뭔가 있나? 한참 생각해 봐도 속절없이 머리만 긁게 된다. 한심하게도 나는 내 몸에 새겨진 선조의 기억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자기변명에 능숙한 나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내 삶에 더럽고 고약하고, 악독한 기억을 만들어 후대에 남기지만 말자. 뭐…보태주지는 못해도 방해하는 기억이 없는 것만 해도 어딘가. 오늘은 이것만 기억하고 잠이나 자자. 잠 잘 자는 기억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