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으로 구분 짓기 힘든 그 시절 역사 이야기

입력 : 2024-11-28 14:47:16 수정 : 2024-11-28 15: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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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조형근

포로감시원 노릇 한 조선 청년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
경계에 선 인물 생각하게 만들어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태국-버마(미얀마)를 잇는 철도 건설에는 한반도 출신의 젊은이 1000여 명이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됐다. 부산일보DB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태국-버마(미얀마)를 잇는 철도 건설에는 한반도 출신의 젊은이 1000여 명이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됐다. 부산일보DB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태국~버마(미얀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며 27번 다리를 완공한 때가 1943년이다. 이 철도 건설에는 연합군 포로 1만 6000명, 태국을 포함한 아시아 노동자 4만 9000명이 강제로 공사에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영국 육군 포로와 일본군과의 갈등을 다룬 영화가 1957년에 나온 ‘콰이강의 다리’다. 이 영화는 경남 창원에도 ‘저도 콰이강의 다리’가 생길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콰이강의 다리 위에 왜 조선인이 있었을까?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알고 보니 한반도 출신의 젊은이 1000여 명이 태국-버마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본군의 포로감시원 노릇을 했다. 안타깝게도 명령은 일본군이 내렸지만 폭력을 직접 행사한 건 대개 이등병 아래 최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었다. 포로감시원들은 잘 감시하는지 늘 감시받았고, 잘 때리라고 늘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전범 재판의 대상이 된다. 징용되어 갔을 뿐인데, 그들의 일본인 상관 다수가 그대로 풀려난 사실을 고려하면 더없이 부당한 일이다.

그런데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을까? 저자는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자만이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콰이강의 다리’의 실제 역사를 읽으며 세상이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인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한반도와 아시아, 서구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얽힌 역사를 18개 이야기를 통해 살펴본다. 역사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썼기에 이 책은 일단 재밌다.


일본군은 태국-버마전선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철도 공사에 동원했다. 조형근 제공 일본군은 태국-버마전선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철도 공사에 동원했다. 조형근 제공

‘저고리 시스터즈’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1939년에 데뷔해 해방 전까지 활동한 한반도 최초의 걸그룹이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을 리더로 8명으로 구성된 이 걸그룹은 일본, 만주국, 북중국 순회공연도 다녔다니 그 시절에 참 대단한 일이 아닌가.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꽃마차’는 지금까지 불리는 히트곡이다. 그런데 원곡에서는 ‘꽃서울’이 아니라 ‘하루빈(하얼빈)’이고, ‘한강물 출렁출렁’이 아니라 ‘송화강 출렁출렁’이었다.

일본이 지배하던 만주를 찬양하는 가사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일본 제국의 침략지가 중국 내륙과 동남아시아로 확장되면서 조선인이 그리는 이국 취향의 대상도 점차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노래들은 제국의 침략에 편승한 욕망을 담은 것이다. 그중 많은 수가 가사가 변경되고 기원이 은폐된 채 살아남았다니 부끄러운 역사다.

신분을 숨기고 만주국의 스타가 되었다 전후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 개입한 일본의 평화운동가 리샹란, 질소비료 개발로 식량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렸지만 염소가스 제조법을 발명해 대량학살의 시대를 불러온 유대인 프리츠 하버, 아프리카 원주민의 사라져가는 삶을 사명을 다해 기록한 나치 연루자 레니 리펜슈탈 등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소개된다. 역사의 격랑기에 휘말린 선과 악으로 쉽게 구분 짓기 힘든 인물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인간적인 전쟁이 이어지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게 되는 대목도 있다. 어느 영국인 포로는 짐짝처럼 열차에 갇혀 이송되던 중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제발 문을 닫지 말아 달라고, 탈출하지 않겠다고, 도착하면 문을 닫겠다고 애원한다. 놀랍게도 문을 닫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쾌적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감시원 중 한 명에게 받은 친절과 동정심을 잊을 수 없었다”라고 썼다. 그들은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고, 도착하자마자 문을 닫아 호의를 베푼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의심받지 않도록 보답했다.

한편 태국은 콰이강의 다리를 ‘죽음의 철도’라는 기존에 잘 알려진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추진 중인데, 일본은 항의하며 명칭 변경을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변하지 않았는데,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까지 두 번 당한 우리가 문제다. 조형근 지음/한겨레출판/312쪽/2만 원.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표지.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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