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다.” 올해 8월 16일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이 KBS에 출연해 한 말이다. 김 차장은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게 과연 진정한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통령실 안보 담당 고위직 인사의 말이니 현 윤석열 정부가 일본을 대하는 기조로 봐도 무방하겠다. 좋게 해석하면,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일본이 스스로 뉘우쳐 반성하고 사과할 것’이라는 의미이겠다. 그런데, 과연 그리되고 있는가.
지난 24일 일본에서 현지 지자체와 민간단체가 주관한 ‘사도광산 추도식’을 통해 ‘일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은 추도식이었으나 실은 경축식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에 대한 사죄는 없고,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분위기만 역력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을 모욕한 셈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반발하지 않는다. 공식 항의 성명이나 대사 초치 같은 대응도 없다. 외교부는 26일 기자들에게 “유감을 표했다”고 전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유감을 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이날 이탈리아에서 열린 G7 외교장관회의에서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상에게 “양국 협력의 긍정적 모멘텀을 이어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윤석열 정부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 모습에서 독도까지 떠올리게 된다.
지난해 12월 국방부가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 ‘독도는 영토분쟁 중’이라고 표현해 논란을 일으켰다. 올해 2월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사이트에 독도가 ‘재외 대한민국 공관’으로 표기돼, 독도가 한국 영토가 아님을 시사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올해 5월 민방위 교육 영상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로 표기된 지도가 등장했다. 올해 7월 일본 정부가 ‘2024 방위백서’에서 독도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자 외교부는 독도 공식 홈페이지 한국어·영문판에는 즉각 항의 논평을 공개했으나, 일본어판에는 한동안 공개하지 않다가 석 달이 지나 언론이 취재에 나서자 마지못해 게재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상징적인 장면이 앞서 있었다. 지난해 3월 16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와의 만남이었다. ‘제삼자 변제 방침’(일본 전범기업의 강제징용 배상책임을 우리 정부가 떠안기로 한 방침)이라는 선물을 안고 도쿄에 간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와 만찬에서 폭탄주로 ‘러브샷’을 했다. 그런데 일본 총리를 역임한 인물 가운데 이른바 ‘독도 망언’을 가장 많이 한 이가 기시다 전 총리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상으로 명백히 일본 고유 영토”라거나 “한국의 독도 점거는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등 그가 행한 ‘독도 망언’이 스무 차례다. 두 번째로 많다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겨우 일곱 차례다. 참고로, 일본 정부는 올해 외교 청서에 “한국이 독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라고 공식 기술하는 등 영유권 주장의 수위를 근래 더욱 높이고 있다.
윤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3·1절 기념사를 보면 윤 대통령이 일본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해당 기념사와 경축사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애써 강조하면서도 과거사나 독도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윤 대통령 주변에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뉴라이트·극우 성향 인사들이 대거 포진한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역사나 역사교육 관련 기관의 임원 중 최소 25개 자리에 뉴라이트나 극우 성향 인사들을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하튼 윤석열 정부는 ‘물잔의 절반’을 비유로 들며 일본을 대해 왔다. 한국이 물잔의 반을 먼저 채우면 일본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나머지 반을 채워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윤석열 정부의 그런 믿음은 보답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의를 외치며 큰 틀에서 양보했지만, 사도광산 추도식에서 보인 것처럼, 일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보다 적극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일본을 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그래서 나온다.
기실 윤석열 정부는 강제 징용 제삼자 배상,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수용,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용인 등 일본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줬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줬나, 나머지 반 잔에 물을 채우기는 할 건가, 지금은 그렇게 물어야 할 때다.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거룩한 그 가르침은, 그러나 예수의 반열에 오른 성인이라야 비로소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 하는 그게 섭리다. 섭리를 벗어난 관계를 요구하는 사람은, 단호히 내치는 게 옳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