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신춘문예-평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이야기

입력 : 2024-12-31 17: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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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 ‘커밍아웃’

전래의 서정으로부터 탈주적 시쓰기

‘서랍 속에서’ 새롭고 낯선 혼종들이 튀어나온다. 여장 남자 시코쿠와 매독을 앓는 키티, 트렌스젠더 대야미의 소녀와 밍따오 엑스프레스 C코스 밴드를 결성한 밍따오들. 2003년, 황병승 시인에 의해 탄생한 주체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횡단하며 문학사의 계보 안에서 비주류로 취급되었던 소수의 자리를 전면으로 획득하고 있다. “사라지려는 힘과 드러내려는 힘의 긴장 속에서”(‘밍따오 엑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분열증적인 주체의 목소리로 “인격의 성장이나 혹은 변태적인 행위에의 몰입과는 또 다른”(‘밍따오 엑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 본능의 파동을 ‘커밍아웃’ 하고 있는 것이다.

황병승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가 발간된 이후, 일부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당시 이데올로기로 통용되던 서정의 권위로부터 완전히 이탈해 버린 그의 시에 대해 ‘정체성 없이 불온하기만 한 시적 주체’라고 평하며 낯섦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때 이들이 느낀 불온함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불온성은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즉, 황병승이 이들에게 불러일으킨 반감은 정확히 기성의 가치를 부정하는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 대한 논거는 김수영의 산문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1968)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수영은 “모든 진정한 새로운 문학은 그것이 내향적이 될 때에는-즉 내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우에는-기존의 문화형식에 대한 위협이 되고, 외향적인 것이 될 때는 기성 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험이 된다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철칙”(‘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을 전제하며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고 말한 바 있다.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미래파 담론이 부상한 맥락을 뒷받침하는 논리로도 작용할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 황병승 외 미래파라고 불렸던 시인들은 ‘미래’라는 이름으로 당대 주류였던 서정시를 겨냥하며 암묵적으로 고정되어 있던 시 쓰기의 틀을 타파하고 새로운 기호로 시단을 확대해 나갔다. 해당 시인들은 “이 세계가 부여하는 기성의 ‘얼굴’을 갖기를 거부”하며 “주체와 언어를 미분(微粉/未分)하고 탈각하고 재구성해 새로운 시적 시공간을 창출하고자 […] 고정된 주체나 목적을 갖지 않는 주체”를 등장시켜 “대상에 대해 다른/다양한 시차(視差/時差/詩差)를 발휘”함으로써 기존의 서정시와는 다른 시를 생성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신형철 평론가는 〈여장남자 시코쿠〉를 비롯한 그의 작품을 두고 “황병승 시에는 황병승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주체 중심의 발로인 서정에 대한 완벽한 해체이다. 이처럼 ‘미래파 시’의 파괴적이고 불온한 상상력은 90년대 시단에서 강조되었던 서정성과 리얼리즘으로부터 벗어난 시도로서 거대 담론을 의도적으로 비틀며 거침없이 입지를 다져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황병승의 시가 한국 시사에서 차지하는 좌표를 살펴보았을 때, 분명 새로운 시적 경향의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황병승의 시적 주체들은 낯선 기법으로 대개 정체성이 다층적이거나 파편화되어 있는 까닭에, 난해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어 당시 일부 독자들이 느꼈던 이질감과 당혹감 또한 분명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의 시에는 새로운 발성으로 발화되는 난해함의 어법만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실질적인 특이성이 존재한다. 요컨대 핵심은 황병승의 주체들이 ‘뒤통수’로 하여금 드러내고자 하는 반향의 특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규명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본질을 통해 작금 문학이, 그리고 시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재질문해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시도를 통해 또 다른 시의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본고에서는 황병승의 작품 안에서 분열증적 주체가 드러나는 방식과 그 의미를 중점으로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다룰 것이며, 이를 기반으로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과 비교하며 그의 전위적인 시 세계가 변화해 온 궤적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여장남자 시코쿠〉 : 시코쿠의 이름으로, 자기 동일성에서 탈출하라.

황병승의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속에는 분열된 주체의 목소리가 종종 눈에 띈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커밍아웃’) 혹은 “여섯 시에 병들고 아홉 시에 죽고 열두 시에 다시 태어나는”(‘원 볼 낫싱’) 다성적인 존재의 출연은 내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Cheshire Cat’s Psycho Boots_7th sauce’)으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황병승이 “당신이라는 가죽 주머니”(‘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를 사방에서 꺼내 “나의 진짜”(‘커밍아웃’)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자기 해체와 분열을 통한 생성을 반복한다는 맥락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편, 시집 초반에는 이러한 존재의 분열적 운동이 발생하기 전에 ‘나’의 단면, 즉 고정적인 자기 동일성을 부정하는 징후가 드러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다.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 ‘주치의 h’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 ‘검은 바지의 밤’

‘나’의 생(生)이 영화라면 단일한 자기 정체성에 예속된 “나는 그만 장면 속에서 제외”(‘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된 것처럼 절망하던 시인은 텅 빈 지하실에서 홀로 소외된 ‘나’를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진짜 장면은 너의 안에 있”(‘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다는 수신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커밍아웃’을 한다. 설령 어떠한 장면을 엉망진창으로 묘사할지언정 다시금 “바지 주머니를 뒤져 새 종이를 꺼내”(‘서랍’)겠다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커밍아웃을 앞둔 시인은 앞선 아쉬움에 분개하듯 “입술을 뜯어버”릴뿐만 아니라 잃어버렸던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위치한 자아의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나’를 분화하는 데 이르게 된다.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하며 “나의 진짜”인 “당신”을 발설(“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한다. 이토록 강렬한 발설에는 “당신을 더 많이 알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이 있고, 그러한 욕망에는 ‘나’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생산하려는 동력으로써 작용한다. 요컨대 이는 위계화되고 구조화된 사회로부터 소각되지 않고 주체를 탈주시키는 투쟁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붉은 스타킹을 뒤집어쓴 남자는 밤새 뒤척거리다…… 아령을 먹고 부고(訃告)를 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안녕 검은 염소야

너는 걷고 나는 달리지 너는 눕지만 나는 춤춘다 너는 차갑고 틀렸어 그러난 나는 옳고 뜨겁다 어쩔 텐가 진짜 장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걸 사라진 나라 사라진 이름 네가 보낸 엽서는 당분가 내가 간직할게 울지 마 끝났어 컷! 컷!

─ ‘니노셋게르미타바샤 제르니고코티카’

물론 이 시집에 나오는 “진짜 장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뒤죽박죽하고 괴랄한 풍경 같은 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니 ‘진짜 장면’은 어디까지나 ‘너’(“진짜 장면은 너의 안에 있어”) , 바로 ‘황병승’ 안에서만 벌어질 수 있다. 이러한 분열증적 경험은 ‘나’를 인식하는 순간을 발생하는 균열의 현상이고, 독자적이면서 무수한 정체성(다양체)으로서 존재하게끔 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가령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여장남자 시코쿠’)이라 말하는 장면은 공통감각이나 상식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주체만의 ‘실재적 경험’이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영역의 반대편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여, 관념적으로만 구성될 수 있는 일들은 세계에서 규정 불가능한 성격을 갖게 되고 만다. 그렇기에 황병승은 ‘시코쿠’라는 규정되지 않은 기표를 꺼내 세계를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건 애초부터 그른 일. 사로잡히다, 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시코쿠’). 온갖 것들을 규정지어 근본적으로 한계를 띌 수밖에 없는 이 사회는 자율성을 갖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코드화되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그렇기에 황병승은 “모든 것을 선언한 뒤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는 방도를 마련한다. 처음부터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이기에 규정할 수 없어 엉망이 되어가거나 반드시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는 풍경들, 그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는 장면을 꺼내 쓰는 것이다.

‘똥색 혹은 쥐색’에는 기표 안에 규정된 기의를 자신의 분열된 감각으로 모두 비틀어버리는 신호가 열렬히 드러난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구름’은 공기 중의 수분이 엉기어서 미세한 물방울이나 얼음 결정의 덩어리가 되어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구름을 “불거진 문장(文章), 한판 굿을 마치고 벗어 던진 겹버선”으로 감각하고 있다. 그것은 “이제 비유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계절”(‘에로틱파괴어린빌리지의 겨울’) 앞에서 세상 모든 풍경을 시의 언어로 목격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속박되지 않는 발화를 통해 상상의 가능태(Potentiality)를 탄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존재 방식을 동일하게 고정하게 하려는 통치의 논리에 저항하고자 ‘환상으로의 폐쇄적인 구조화와 이념 파괴’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나는 (당신)을 가지고 있어요 댁들처럼 (당신)이라는 가죽 주머니를 나도 가지고 있지요 처음 그대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그대를 (당신), 하고 불러봤겠죠 행복했겠죠 내가 (당신)(당신) 부르면 그대도 즐겁게 안녕, 하고 답했으니까요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불렀을 거예요 (당신)(당신) 가죽 주머니 가득한 소리들 그대는 머리가 아팠겠죠 왜 안 아팠겠어요 그대 떠나고 공처럼 부풀었던 가죽 주머니가 삼 백 예순 날 (당신)(당신)을 연신 노래하는데 눈앞이 다 캄캄했었지요 ─ ‘Cheshire Cat’s Psycho Boots_8th sauce’

그런데 이 시에서는 (당신) 혹은 그대는 분명 ‘나’가 가지고 있는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그들은 주체가 굳이 추측을 행하게 만든다는 점(“그대는 머리가 아팠겠죠”)에서 주체와의 차이를 지니는 대상으로 처리된다. (당신) 혹은 그대는 ‘나’와는 다른 존재, 즉 타자로써 그려지는 것이다. 이토록 몰아치는 혼란함 속에서 시인은 어떠한 새로운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당신)과 그대는 단지 하나의 기표로만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황병승 작품 속 무분별하게 개인화 되어있는 화자들은 정말 황병승 그 자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이즈음에서 위에서 언급한 “탈주체화를 통한 무수한 정체성의 탄생”과 신형철 평론(“황병승 시에는 황병승이 없다”) 사이로 벌어지는 간극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듯싶다. 황병승의 시 속에는 투사물이나 대상들이 여럿 등장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의미나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는 대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들뢰즈의 생성론에 따르면, 황병승의 시적 기법처럼 각 양태 간의 가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존재 개체는 다수가 될 수 없다는 관점을 지닌다. 각 양태가 표현하는 것은 하나이거나 다수라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흐름 자체, 변화 자체, 되기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의 틀을 잠시 빌려 다시 작품을 이어 읽어보자.

나는 두번째 죄의 계절을 맞았습니다

더 이상 태어나기 싫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주근깨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지난밤 태내의 쌍둥이처럼 친밀했던)

나는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났습니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차창의 불빛 환한 밤 기차처럼

이렇듯 나는 너무 빤하고 선언은 늘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선언의 천재

모든 것을 선언한 뒤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습니다

……결국 빛이 빛을 찾아 헤매는 슬픈 시간입니다

[…]

여기는 잡탕찌개야 온갖 것들이 끓는군

지구의 한쪽 그리고 도시 한구석의 허름한 술집

H의 말대로 온갖 것들이 끓는 잡탕찌개

나는 그 온갖 것들이

부글거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끓고 싶은

가랑잎 범벅으로 보였습니다

삼 년째 암울한 H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사 년째 암울한 자가?

─ ‘사성장군협주곡(四星將軍協奏曲)’

시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첫째, 화자가 “주근깨 여자”의 행방을 궁금해하기. 두 번째, “모든 것을 선언한 뒤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겠”다고 선언하기. 세 번째, “여기는 잡탕찌개”라고 말하는 H의 말에 동조하기. 그리고 그 풍경에 대해 다시 한번 자기 감각으로 호응하는 일이 전부다. 다시 말해, 그는 ‘주근깨 여자’나 ‘H’의 존재, 혹은 자신의 ‘선언’ 자체에 대해 부연하기보다 이미 “나의 실패담”이 혼재하는“잡탕찌개” 같은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끓”어 올라 그 속에서 진정한 ‘나’를 구별 짓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낼 뿐이다. 이는 시인이 ‘밍따오 엑스프레스 C코스 밴드의 변’에서도 말했듯, “이미 경험해 버린 우스스한 감정들”보다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인격의 성장이나 혹은 변태적인 행위에의 몰입과는 또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어떤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들뢰즈의 관점에서 욕망은 어떤 제도적인 속박이나 한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흐름(과 단절, 재접속) 그 자체임을 고려한다면, 이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욕망하는 주체는 ‘결여’에 근거한 욕망이 아니라, 충만하고 생산적인 욕망을 토대로 또 다른 판도를 생산한다. 따라서 시인은 자기 동일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토대로 자기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다양체들을 찾기 위한 ‘탈출’을 도모하는 것이며, 여장남자 시코쿠나 앨리스 부인, 아홉소ihopeso 씨, 변덕쟁이 소녀 등 혼종의 주체를 통해 수많은 규정과의 단절지으며 세계에 재접속하는 ‘생산의 생산’을 이뤄내고 있는 셈이다. 혼란을 야기하는 독백 텍스트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황병승의 시적 언어가 전해오는 선언은 이것이다. “뭉쳤다 흩어지고 다시 뭉쳤다 흩어지”(‘판타스틱 로맨틱 구름’)며 “어딘가에 있을 당신”을 “정확하게 짚어내고자 한다는 것”(‘비의 조지아’). 바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다.

하여, 황병승의 시 세계는 주체의 탄생으로 이루어진 장면을 시적 언어로 환치해 내는 과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온갖 것들이 끓는” 세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하나씩 해체해 나가며 ‘나의 진짜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 속에서 주체들이 끝없이 “사방에서 자꾸만 태어”나는 흐름, 그것이 황병승이 지닌 불가항력적 시적 에너지다. 황병승의 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종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 관습화된 언어, 화자가 감지하는 사건의 진위나 인과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점이다. 이성을 구속하는 주된 이념들을 뒤집어 차이를 만들어내는 혼종의 목소리는 생성적 차원에서 나아가는 일종의 탈주체화 과정이라는 것. 그렇기에 〈여장남자 시코쿠〉는 결국 시인이 ‘과연 이 세상에서 나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하고 스스로 되묻는 “빛이 빛을 찾아 헤매는 슬픈 시간”,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위와 같은 원론이 다음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서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며,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드러난 방향성와 달리 황병승의 시 세계에 어떠한 변화가 생겨났는지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육체쇼와 전집〉 :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으로부터

황병승의 세 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은 앞선 시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B급 하위문화 코드’가 보이지 않는다. 이 시집에는 절멸하는 세계에서 화자의 일상을 조탁하고, 그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Cul de Sac’)을 길어올린다. 〈여장남자 시코쿠〉에서는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목소리에 이름을 붙이고 존재를 호명했다면, 〈육체쇼와 전집〉에이르러 자기로부터 떠오르는 무수한 존재들이 수렴하고 있는 ‘나’를 탐색한다. 내부에서 외부로 뻗어나가던 에너지가 다시 존재의 근원으로 모이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와중에도 두 시집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감각은 바로 불가항력적인 에너지일 것이다. 전자는 ‘나’로부터 진동하는 존재의 진폭을, 그리고 후자는 부조리한 세계로부터 속박되어 이름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불가항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터져 나왔던 주체에 대한 욕망은 이제 없다.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육체쇼와 전집’을 보면, 이곳에선 "악착같이 꿈꾸면서 악착같이 전진하면 악착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예측만이 오로지 유효해 보인다. 그렇기에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 저는 누워 있습니다 보란 듯이"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렇게 무력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기 전에 그를 둘러싼 세계에서 화자가 감각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읽어 보자.

저는 누구입니까 이 육체와 전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저는 근육이 없습니다 톱니가 없어요

잠잘 때 코에서 죽은 사슴 냄새가 나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뭐가,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중얼거리다, 라는 말에 문제가 있습니까

(…)

저는 구두가 없어요 구두가 있다면 내 두 발을 끊어 가도 좋아, 농담입니다

저는 생각이 없어요 전집이 없습니다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골방의 아이들은

-‘육체쇼와 전집’

위 시편에는 "뭐가 들이닥친 것"인지,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풍경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나에게는 똑바로 설 수 있게 하는 근육이나 구두가 없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생각조차 없다. 다시 말해, 화자를 둘러싼 세계는 굴복 앞에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소거된 곳에 불과하다. '나'는 평생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를 가리어 모은 전집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순간 'B급 하위문화 코드'로 특별함을 부여받았던 주체의 위치는 보다 일상적인 층위로 끌어내려지는 듯하다. 그렇기에 화자는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파올라도/호세도, 로베르토도 아니야/차라리 나를 옛날에 살던 집, 지하 방 애라고 불러줘"(‘솜브레로의 잠벌레’)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사랑을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이별을 모르면서 이별했다고 말하고/살아 있으면서 지난 새벽에 죽었다고 말하는" 세태가 넘쳐나는 세상, 기표 안에 규정된 기의처럼 짜여진 세상에서 그는 삶을 이어가는 자신의 방식에 대해 "한 번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솜브레로의 잠벌레’)라고 한다. 한편으로 이 목소리는 자기 의지나 선택, 판단의 몫까지 세상에 저당 잡힌 처지를 운명과 같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모터와 사이클’)하는 듯싶다.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시간"(‘쥐가 있던 피크닉 자리’)이 흐르는 탓에 일상 곳곳에는 "절박과 침체, 파멸과 혼돈"(‘Cul de Sac’)이 몰아치고, 화자가 낼 수 있는 목소리에는 "슬픔과 분노와 공포"(‘Cul de Sac’)가 서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화자가 실존적 갈망에 대한 의지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화자가 구조화된 논리가 작동하는 세상 앞에서 시도하는 것은 바로 '통찰'("통찰해봅시다"(‘Cul de Sac’))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멸치처럼 마르고 황달 걸린 노인네의 모습"으로"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가는 육체는 나와 세상을 통찰하는 데 있어 방해되는 요소이다. 늙음은 "앞날에 대한 경각"(‘티셔츠 속의 젖을 쓰다듬다가’)조차 갖지 못하게 만든다. 하여, 화자는 실존을 위협해 오는 세계 앞에서 방해물에 불과한 육체를 '쇼'를 구성하는 대상의 층위로 분리한다. "마치 몸속의 또 다른 생명체가 육체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Cul de Sac’) 육체와 정신을 분리함으로써 "나는 다만 껍데기에 불과"(‘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한 상태였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때, '쇼'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미지를 바탕하여 보기(seeing)의 대상으로 구성된 일종의 무대이다. 이미 사회에 의해 대본처럼 짜여진 운명은 "우리를 지구상에서 가장 못나고 어리석고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모터와 사이클’)을 알고 있기에 화자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육체의 쇼는 무엇입니까"라며 '육체'를 정신과 달리 수동적인 위치에 둔다. 이때부터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개인의 의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이 능동성은 '무엇을 수행하는 능동성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택한("칠일 낮밤을 누워 있습니다 죽은 듯이") 것은 무엇을 하든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선택이자, 능동성이 보장된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화자에게 주어진 일은 육체적으로는 무엇도 하지 않는 대신 "생각"(‘벌거벗은 포도송이’)을 바탕으로 '나'를 파악해 나가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여러 시편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 ‘강은아와 은반지’ 에서 '너'라고 지칭되는 은반지의 주인은 "강은아를 향해 강은아가 누구니 강은아가 누구였어 강은아를 너는 본 적이 있니"라고 묻는다. 이 반복되는 물음은 '강은아'라는 고정된 의미를 비틀며 생기는 틈새로 실재의 본질을 향해 사유를 증폭시키도록 유도한다. 물론 실재의 공백을 만들어 내는 세상 앞에서 본질에 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확증은 어디에도 없다. 되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깊은 마음"(‘호두 없는 다람쥐처럼’)을 모르고, "너 역시 그렇게 읽고 싶어 했지만/단 한 순간도 붙잡을 수 없었"(‘호두 없는 다람쥐처럼’)다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현실을 전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배신할 수 있"(‘부식철판’)다는 전제 앞에서도 "그것을 뛰어넘으려"(‘부식철판’)고 시도할 따름이다.

특히, 시집 속엔 존재를 감각하는 장면이 전개될 때마다 '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몇 편의 시에 등장한 대목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꿈'은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화자가 직면한 세상과 꿈이 상반된 논리를 지녔다는 점에 따라 꿈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무의식'을 기반한 꿈을 바탕으로 시인은 탈-의식화의 실현을 이뤄내는 셈이다. 인과적 논리나 시공간적 구조에 따라 판단하고 추론하는 것은 결국 대본의 일부를 뜯어내 정해진 값을 도출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에, 화자에게 세상에 작용하는 보편적 원리를 파헤치는 독법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의식이 기반된 경험들을 논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백년 전의 일들"과 "잊었던 백년전의 목소리"처럼 무의식 속에서 존재의 '진실'을 포착하기를 시도한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곳의 창문은 밤도 낮도 보여주질 않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나의 발자국 소리는 나를 놀라게 하고, 나의 목소리는 나를 괴롭게 하지요. ─ ‘목마른말로(末路)1’

그러나, 시인의 고투가 만들어내는 본질의 형상은 세상으로부터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 '나'의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목소리는 수신자가 없어 독백으로 뒤엉킨다. 가령 시집 곳곳에 남발하는 수십 개의 질문이나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 말하는 거지?"(‘카덴차에 이은 긴 트릴’)와 같은 물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나'의 위치는 결코 사적일 수 없기에("나는 사적이지 않다", ‘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황병승의 세계는 오롯한 '나'의 세계가 아닌 "내가 만든 세계"(‘자수정’)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만든 세계에서도 세계를 실존하는 개별인간과 무관하게 존립하는 어떤 보편적인 ─ 다시 말해 존재자적이면서도 존재론적인 '신'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곳에 등장하는 "나의 위대한 신"(‘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은 근원적이라거나 보편적인 실체로 그려져 있지 않다. ‘신scene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에서 시인은 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라는 것도 해보았네/나라는 작은 신을 향해/나라는 거대한 신을 향해". 다시 말해, 신은 '나'를 빗대는 메타포인 동시에 제목에 덧붙여 있는 수식어, Scene을 통해 신은 곧 장면을 나타내는 의미로 확장된다. 해당 시편에 등장하는 신을 '장면'으로 겹쳐 읽을 때, '기도'가 향하는 곳은 나의 작고 거대한 장면이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기도의 내용이 명료하게 드러나진 않으나 여기서 주목해 볼 수 있는 것은 신이 나를 삼켰다는 서술과("신이 나를 삼켰듯 (…) 신은 위대할수록 처참한 맛이 나지/잿더미를 무슨 수로 삼킨단 말인가") "내가 쓴 책"(‘塵塵塵’)에 대해 "기어이 나를 짓밟고 올라서는 책"이라고 표현한 맥락이다. 이는 미래파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황병승이 그의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가 신랄하게 이뤄졌던 현실과 충돌하며 송출된 지점일 수도 있겠다.

'나'를 옥죄는 현실을 전복하기 위해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혼종적 목소리를 토대로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이뤄내려던 시도는 '황병승적 시 쓰기의 재생산'을 불러일으키며 황병승의 시가 더 이상 황병승적인 것으로 국한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이르게 했다. 다시 말해, '황병승'이라는 아이콘을 의도적으로 확대 재생산 및 대량복제 하는 시단의 전반적 경향에 따라 황병승의 시작법에 의한 폐쇄된 시학을 만들어내며, 그는 또다시 '황병승'이라는 이름 아래 무기력하게 정의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독자들에게 이전의 모든 발화가 여지없이 실패로 드러난 현실에서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내일은 프로’)했다고 고백한다. 이는 실패를 실패하는 방식(‘내일은 프로’)으로 "내가 쓴 시"(‘塵塵塵’)에서 실현되지 못한 잠재적 가능성들을 다시 꺼내보려는 셈이다. 다소 역설적으로 읽히는 이 실패에 대한 고백이야말로 황병승의 시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가능성의 암시이며, 시-쓰기 작업을 지속해서 이행하게 하는 동력이다.

실패의 시인, 실패한 자

어이 이봐, 왜 그러고 있어. 내 글이 그렇게 감동적인가, 세상이 잠깐 다르게 보이겠지. 하지만 이봐, 잠깐뿐이라고, 아마도 너는 죽을 때까지 텅 빈 페이지들을 넘겨야 할 거다. 방구석에 처박혀 똥구멍이나 긁고 있는 자식아, 네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 ‘보람 없는 날들’

지난 90년대 이후 기법의 혁신, 주제의 변주, 이미지의 조합, 사물의 대체, 주변부의 주류화, 상징적 언술 체계 등 수많은 변화의 양상들은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움은 "잠깐"일 뿐, 또다시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계속 불러오기 마련이다. 새로움은 시간이 지남에 의해 빠르게 상실된다는 점에서 새로움에 한정된 미학은 "텅 빈 페이지"와 같은 허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황병승은 미학적 텍스트 형식이나 서술 방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읽을 것이 아니라 작품의 궁극적인 목적인 "저는 누구입니까"(‘육체쇼와 전집’)와 같은 물음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견딜 수 없는 세계 내 존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어쩌면 초월해 가려는 몸짓이다"라는 선언처럼 시인이 자신을 "실패한 자"(‘내일은 프로’)로 여기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시단으로부터, '황병승'이라는 프레임으로부터, 간극을 형성하기 위함인 것이다.

미래파가 출현한 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 미래파의 시적 문법은 여전히 '낯섦'의 문법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다. 이미 익숙해진 시적 발화 앞에서 우리는 낯섦이라는 테두리 안에 담긴 진실을 감지해야 한다. 낯섦의 미학에 의해 가려진 황병승의 시 세계는 구조화된 논리에 속박되지 않은 시적 언어로 구축한 장면들에 가깝다.

'나'를 은폐하는 세상으로부터 자기 동일성을 해체하는 시도를 환기했던 〈여장남자 시코쿠〉는 〈육체쇼와 전집〉에 이르러 다시 한번 어떤 사회적 억압들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인하는 단계로 확장된다. 즉, "나의 진짜"(‘커밍아웃’)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실패'와 맞닿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황병승은 〈육체쇼와 전집〉의 마지막 수록작인 ‘내일은 프로’에 이르러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실패의 선언을 한다.

자기 동일성의 취약성은 다름 아닌 확신이기에, 시인은 쉽게 답변을 도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황병승이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전해오는 목소리는 "끊어져도 꿈틀거리고, 죽어서도 꿈틀거리는 위대한"(‘톱 연주를 듣는 밤’) 시인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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