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계몽령이라고 하는 그들

입력 : 2025-02-08 09: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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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에서의 윤석열 탄핵 반대 시위대 모습. 연합뉴스 지난 1일 서울에서의 윤석열 탄핵 반대 시위대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선포한 계엄령을 두고 일부 인사들이 “계몽령” “계몽령” 한다. 그러하니, 계몽이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계몽, 스스로 밝게 하는 것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과 관련해 반드시 거론되는 철학자다. 1784년 발간된 그의 저작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계몽에 대한 상징적 정의로서 지금도 무겁게 회자된다. 그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스스로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니 왕이나 교회 등 지배층의 지도에 안주한다. 이를 벗어나려면 홀로 서려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칸트는 말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라!”

이때 계몽은 타율적이지도 않고 피동적이지도 않다. 남이 이끌거나 만들어 주는 게 아닌 것이다. 자율적이며 능동적이다. 자기가 스스로를 밝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밝아지면 자신을 옭아매던 굴종 같은 낡은 껍데기는 벗어던지기 마련이다. 칸트가 정의하는 바 계몽이 그런 것이라면, 그로 인해 민중이 스스로 각성하고 마침내 봉건의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리는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전혀 무리는 아니겠다. 여하튼, 이러한 계몽이 지금 “계몽령” 운운하는 그들이 말하는 그 계몽이 아님은 분명하다.


■국가가 국민을 교화한다?

본래 계몽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그리 자주 쓰였던 단어는 아니다. 쓰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중국 송나라 때 주희의 <산학계몽(易學啓蒙)>이 그 하나로, 여기서 계몽은 ‘특정 학문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는 일종의 해설을 의미했다. ‘어리석은 이를 가르치거나 깨우친다’는 의미로는 계몽보다는 훈몽(訓蒙)이나 격몽(擊蒙)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였다.

동아시아에서 계몽이 널리 쓰이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 학자들이 서구의 칸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영어로 표현하면 ‘Enlightenment’라는 개념을 굳이 ‘계몽’으로 번역하면서 이후 동아시아에서도 계몽이라는 말이 보편화됐다.

출발부터 어긋났으니 칸트의 계몽이 뒤로 온전히 전해졌을 리 없다. 메이지 이후 일본 사회는 계몽이라는 말을 두고 혼선에 빠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칸트의 자기 각성에 기반한 계몽의 개념은 희석되면서 결국 학문의 공간에서만 남게 됐다. 특히 위정자들이 계몽을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라는 동아시아 전래의 의미와 뒤섞어 그 쓰임을 굴절시켰다. 국가가 국민을 교화한다는 개념어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사상적 발판이 됐다.


올해 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현판이 시위대 난동으로 떨어져 있는 현장. 연합뉴스 올해 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 현판이 시위대 난동으로 떨어져 있는 현장. 연합뉴스

■계엄과는 함께일 수 없는 계몽

계몽령(啓蒙令)에서도 음험한 그 기운이 느껴진다. 계몽을 명령한다? 누구를 강제로 계몽한다는 건가. 지금 한국의 문맹률은 0%에 가깝다. 대학 진학률은 80%가 넘는다. 정보통신(IT) 환경도 한국이 세계에서 으뜸을 달린다. 이런 나라의 국민을 국가 또는 특정 세력이 계몽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21세기 한국의 대다수 국민은 위정자들이나 소위 엘리트라는 계층보다 지적 수준이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을 밝힐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계몽한다는 말인가. 애초에 온 국민과 세계인이 목도한 계엄을 계몽이라고 우기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억지이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건 어설픈 식견에서 비롯한 몽매(蒙昧)일 따름이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도 계몽을 왜곡·오용한 경험을 갖고 있다. 18세기의 이른바 계몽군주가 그 예다. 좋게 표현해서 ‘깨어 있는 군주’이지, 실태로는 ‘절대왕정을 노리는 잔혹한 독재자’로 군림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으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을 처단했다. 칸트에 따르면, 진정한 계몽은 계몽군주 같은 독선의 위정자를 거부하는 자아를 밝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몽은 계엄과는 함께할 수 없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어쩌면 계엄을 계몽이라 진정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을 법도 하겠다.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대통령이 태어나신 뜻깊은 오늘’이라는 류의 노래를 속없이 지어 바치고, 또 그 행태에 희희낙락하는 이들이 그런 무리일 테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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