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신 김형주 감독이 영화 ‘승부’로 스크린 나들이에 나선다. 한국 바둑계 전설이자 사제 지간인 조훈현·이창호 국수의 바둑판 위 인생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감독은 겉보기엔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바둑판 위 대결을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풀어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살다 보면 희미해지는 여러 가치가 있는데 그 부분들을 고민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김 감독이 ‘보안관’(2017년) 이후 두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풀었던 감독은 이번엔 부산역 부근과 부산외국어대 등에서 영화의 주요 장면을 찍었다. 대표적으로 극 중 한국기원 앞 관철동 거리는 부산 중구 중앙역 부근에서, 조 국수가 성냥을 쌓는 장면은 사상구의 한 다방에서 촬영했다. 조훈현, 이창호 국수가 사우나를 하는 장면은 금정구의 한 목욕탕에서 만들어지는 등 부산의 곳곳이 담겨 익숙한 장소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김 감독은 “학창시절을 부산에서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상경했다”며 “이번 작품도 부산에서 꽤 많은 장면을 찍었다”고 웃었다.
영화는 단순히 조훈현과 이창호의 바둑 대결이 아닌, 인물간 드라마를 함께 비춘다. 이병헌이 조훈현 국수를, 유아인이 이창호 국수를 연기했다. 성정이 ‘불같은’ 스승 조 국수와 ‘물 같은’ 제자가 오랜 시간 맺은 인간적인 관계는 영화의 재미와 깊이를 더한다. 이 국수가 처음으로 스승의 타이틀을 빼앗은 1990년 2월 최고위전(1959년 부산일보 창설 바둑 기전)은 영화의 백미다. 김 감독은 “대결이 벌어지고, 스승이 패하면서 서로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 말린 두 사람을 보여주다가 이를 극복하고 정상에 도전하는 스승의 모습을 잘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부분 정상을 찍고 바닥으로 떨어지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조 국수는 다시 정상을 탈환해요. 조 국수가 실수를 깨닫고 성장하는 모습도 있고요. 이 부분에 매료됐어요.”
바둑을 소재로 한만큼 두 사람의 바둑 대결은 이야기를 이끄는 주요한 소재다. 바둑판 위 백돌과 흑돌이 마치 한 판의 게임을 하듯 빠르게 움직이는데, 이는 영화의 속도감을 더해준다. 바둑을 아는 사람은 더 깊이 영화를 즐길 수 있고, 모르더라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놀라운 점은 김 감독을 비롯해 주연을 맡은 이병헌·유아인 모두 처음에 ‘바둑 문외한’이었다는 것. 감독은 “바둑 소재로 한 영화니 이걸 허투루 다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자료를 정말 많이 찾아봤고,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프로 바둑 기사가 현장에 상주했다”면서 “당시 대국 기보를 최대한 고증해서 쓰려고 했다”고 귀띔했다. “바둑은 축구나 격투기처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결이 아니에요. 영화를 하다 보니 대국 후 ‘복기’가 참 흥미롭더라고요. 어떤 스포츠도 승자와 패자가 마주 앉아 끝난 경기를 다시 돌아보지 않잖아요. 품격이 느껴졌어요.”
영화 속 조 국수처럼 이 작품도 개봉을 앞두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유아인의 마약 투약 혐의로 촬영 이후 약 4년 만에 관객과 만나게 됐다. 유아인은 이 작품에서 이창호 9단을 연기했지만, 이번 영화 홍보에는 함께하지 않고 있다. 김 감독은 “바닥에 떨어져서 몸부림치는 극 중 조훈현 국수를 보면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며 “역시 견디는 것밖에 답이 없다는 걸 느끼면서 개봉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인생이 늘 좋을 수 없잖아요. 돌고 돌아서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몇 년 사이에 정신력이 강해진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하기 전으로 돌아가도 저는 다시 한번 도전할 것 같아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동료들과 함께했다는 것 자체가 제가 이 작품을 할 이유인 것 같습니다.(웃음)”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