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고율의 상호 관세를 부과한 가운데, 우리 정부는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 방미를 추진하는 등 공식 협상 채널 가동에 나설 계획이다. 그러나 정부는 협상의 결과물을 얻는 데 서두르지 않고, 전략 수립에 신중을 기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한국 기업들의 생산기지인 베트남 등에도 고율의 관세를 부과한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의 대대적인 공급망 재편 가능성이 있고, 일본·유럽연합(EU) 등 경쟁국의 대미 협상 경과도 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6일 “주요 산업계가 해외 생산기지로 삼는 곳도 고율 관세를 맞은 상황이어서 우리 기업들의 교역 구조와 공급망 재편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며 “경쟁국들의 상황도 지켜봐야 하므로 한국이 먼저 나서서 패를 내보이며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절대 유리한 게 아니다. 지금은 차분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배경에는 미국이 매긴 상호 관세율이 비관세 장벽이나 무역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라기보다는, 단순히 대미 무역 흑자에 비례해 정해졌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정상외교에 발 빠르게 나섰던 인도와 일본 등도 이번 상호 관세 조치에서 예외를 받지 못했다.
상호 관세율을 낮추려면 대미 흑자를 줄여야 하지만, 수출이 핵심 동력인 한국으로서는 미국 수출을 줄일 수 없는 처지다.
삼성·LG 등 한국 기업의 해외 생산기지인 베트남과 인도 등 글로벌사우스 지역은 이번 상호 관세 최대 피해 지역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생산 50% 이상을 베트남에서 조달하고 있다. 베트남 상호 관세율은 46%에 달한다.
업계 관계자는 “베트남 등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기 어려워지면서 수출 지역을 유럽이나 중국 등으로 다변화하는 동시에 상호 관세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으로 보내는 전략이 검토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경쟁국 움직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이 초기 협상을 통해 상호 관세율을 일부 낮추는 데 성공하더라도, 이후 협상에 나선 경쟁국들이 한국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낸다면 결과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으로 협상의 실질적인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점도 정부가 대미 협상에 속도를 내기 어려운 요인이다. 정상 간 소통을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알래스카산 액화천연가스(LNG) 구입’ 등 굵직한 카드는 새 정부 출범 이후 꺼내들 가능성이 크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의 경우 새 정부가 들어서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 차원에서 사용될 카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관세로 직격탄을 맞은 자동차 산업에 3조 원 규모의 긴급 정책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특히 5대 금융지주를 중심으로 관세 충격이 큰 기업에 원활한 자금 공급도 당부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번 주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을 활용해 ‘긴급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할 방침이다. 정부 관계자는 “자동차 산업 정책금융 지원 규모는 3조 원 수준인데 산업은행 등 기존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정부는 미래 차 등을 지원하기 위해 산업은행에 5년간 최대 50조 원의 첨단전략산업기금 신설도 확정했다. 국회에서 관련 산업은행법 개정안과 정부 보증 동의안이 통과되면 연내 실제 지원을 개시할 방침이다.
금융당국은 7일 5대 금융지주와 정책금융기관을 소집해 실물 부문에 원활한 자금 공급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 자리에서 관세 충격이 큰 기업들의 장단기 자금 조달 상황 등을 점검하고 자금 공급을 강조할 계획이다. 자동차 산업의 금융권 대출이나 시장성 차입(익스포져) 규모는 50조 원가량으로 금융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김덕준 기자 casiopea@busan.com , 김진호 기자 rpl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