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 바꾸는 채식, 제로웨이스트까지 이어져

입력 : 2025-05-09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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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고 서원 채식 식당 '에코토피아'
영화 보고 텃밭서 딴 채소로 요리
채식주의 빵집의 성지 '꽃사미로'
채식 내세우지 않아도 줄 서는 빵집


에코토피아에서 운영하는 ‘삶을 위한 레시피5’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본 뒤 ‘그린 채식 페스토 파스타’를 함께 만들고 있다. 에코토피아에서 운영하는 ‘삶을 위한 레시피5’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본 뒤 ‘그린 채식 페스토 파스타’를 함께 만들고 있다.


■오늘 하루 완벽하셨나요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이 2007년부터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전부터 신기하게 생각됐다. 지난해 허아람 대표가 “서점의 일을 부엌으로 끌어와 채식 식당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영혼을 나누는 문화 기획을 늘려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던 기억도 났다. 대체 채식이 뭔지 궁금해졌다. 에코토피아의 구글 평점은 4.7로 상당히 높았다. 에코토피아의 메뉴인 채식 카레, 어린잎 두부 비빔밥, 브로콜리 버섯 덮밥, 두부 스테이크, 채소 그라탕, 토마토스파게티, 사계절 샐러드는 가격이 1만~1만 8000원으로 비싸지 않으면서도 맛이 있다는 평이다.

 허 대표는 2006년 스웨덴의 한 채식 식당에 갔던 경험이 에코토피아를 열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벽에 굶주린 아이의 사진 한 장만 덜렁 걸린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토론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고, 돌아와 한 달 만에 채식 식당을 열었다는 것이다. ‘나락 한 알에 우주가 있다’는 장일순 선생의 사상을 구현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화분 옆 바구니에 각 나라에서 온 손님들이 보내온 편지가 수북이 쌓인 걸 보면 그런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다. 올해 초에는 한 미국인 손님이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이곳이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며 손 편지와 함께 초콜릿을 보내왔단다.

 에코토피아는 지난 3~4월 ‘삶을 위한 레시피5’라는 프로그램을 열었다. ‘영화 감상의 날’에는 생태적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보고, ‘요리가 있는 날’에는 지구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채식 요리를 만드는 시간을 가지는 방식이었다.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에 직접 참가해 봐야 채식이 이해될 것 같았다.

 지난달 2일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본 뒤 9일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 가까이에’라는 이름으로 ‘그린 채식 페스토 스파게티’를 만드는 시간에 참관을 신청했다. 주부, 직장인, 자영업자 등 신청자 9명이 이날 자리를 함께했다. 시작은 에코토피아 앞 텃밭에서 바질, 고수, 샐러리, 상추 따기였다. 도심 속 텃밭에서도 우리가 먹을 만큼 채소가 잘 자라고 있었다.

 영화 이야기로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오늘 하루 퍼펙트하셨나요?”라는 진행자의 질문은 기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늘 너무 바빴지만 중간중간 아름다운 꽃도 보고 느끼고 해서 행복했다”는 어느 분의 대답에 나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은 책방에 가서 책을 고르고, 음반 가게에서 음반도 고른다. 그런데 우린 이제 알고리즘이 알아서 모든 걸 가져다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려는 세상이다”라는 한 참가자의 영화 감상평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삶은 완벽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데, 어떻게 ‘퍼펙트 데이즈’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린 채식 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시간이 이어졌다. 조금 전 텃밭에서 딴 채소가 아낌없이 들어갔다. 못다 한 영화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가 양념처럼 쏟아졌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직장을 마치고, 아이들 밥을 차리고 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의 밥’을 먹기 위해서 말이다. 채식은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쓰레기를 최소화하고 재활용 및 재사용을 통해 자원을 보호)와 함께 간다. 이날 참석자 중 심플리파이 김상원 대표는 채식을 하다 제로웨이스트 가게까지 열게 되었다고 했다. 뜻밖으로 음식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다. 채식은 삶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비건들의 성지로 불리는 ‘꽃피는 4월 밀익는 5월’ 최태석 셰프(오른쪽)와 임은주 대표가 채식 빵들을 선보이고 있다. 블로거 ‘울이삐’ 제공 비건들의 성지로 불리는 ‘꽃피는 4월 밀익는 5월’ 최태석 셰프(오른쪽)와 임은주 대표가 채식 빵들을 선보이고 있다. 블로거 ‘울이삐’ 제공

 

■우유·버터 없이 빵이 되나요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 “뭐 먹고 살아?”이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을 바꾸면 세상에 먹을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 최태석 셰프가 쓴 <시작하는 비건에게>이다. 이 책은 도시락 메뉴가 고민인 날, 술맛 돋우는 안주가 필요한 날, 달달한 디저트가 먹고 싶은 날, 힘이 딸리는 날, 길거리 간식이 당기는 날 등 11가지 상황에 따른 104가지 채식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모두 일상 식재료를 활용했다는 점이 신기할따름이다. 비건 스시는 모던한 예술 작품이었다. 보쌈, 장어덮밥, 수제두부패티버거, 어묵탕까지 채식으로 가능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최 셰프는 군대를 다녀온 뒤부터 지금까지 36년째 채식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서 비건 빵집 ‘꽃피는 4월 밀익는 5월(이하 꽃사미로)’을 운영하는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꽃사미로’는 채식주의자들의 성지(聖地)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최 셰프가 함께 운영하는 비건 전문 ‘3월의 학교’를 거쳐간 학생들이 연 채식 빵집이 전국적으로 100곳도 넘기 때문이다.

 주택가에 자리잡은 꽃사미로는 외관은 평범했지만 여러 모로 많이 달랐다. 영업을 금·토·일, 일주일에 3일만 한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빵은 트렌드에 민감해 나머지 3일 월·화·수는 연구개발만 한다고 했다. ‘수입밀로 빵을 굽지 않습니다. 비료와 살충제 없이도 잘 자라는 토종 앉은뱅이 밀로 빵을 만듭니다. 첨가물 없는 빵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연구합니다.’ 빵집 외벽에는 보기 드문 ‘셰프 선언문’이 붙어 있었다.

 비건 빵은 유제품과 동물성 재료를 전혀 쓰지 않는 빵이다. 이곳을 찾아가며 가장 궁금했던 점은 어떻게 우유, 버터, 생크림 없이 빵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최 세프는 처음에 빵을 배우러 제과점에 들어갔을 때 오너셰프가 달걀을 깨는 일을 시키자 곧바로 유니폼을 벗고 나왔다는 일화부터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국내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비건 빵을 만들겠다는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버터 대신에 고소한 현미유를 쓰고, 생크림 대신 바닐라와 코코넛 밀크로 만드는 식으로 해서 세월이 지나 노하우가 쌓이다 보니 진짜 맛있는 빵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단다. 사람들은 그가 여는 가게마다 비건 빵집인지는 몰라도 맛있는 빵집이 생겼다면서 용케도 알고 찾아와 줄을 섰다.

 채식 시장이 성장하다 보니 지금은 대기업의 협업 제의도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N사와는 비건 치즈를 함께 만들었다. “비건 치즈를 이렇게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쓸 수가 없다.” 최 셰프의 조언에 따라 연구해서 만든 치즈가 시판되고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비건 시장을 겨냥해 국내 기업들도 라면, 김치, 만두 등 K푸드를 비건화해 수출 시장을 확대하는 중이다.

 최 세프는 일찍부터 명상을 하다 채식을 하게 되었고 아내인 임은주 대표도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임 대표는 꽃사미로 옆에서 비건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작은 책방 ‘비비드’를 3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꽃사미로는 ‘논비건’ 고객이 대부분일 정도로 채식을 일부러 내세우지는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생활 속에 스며들도록 비거니즘을 실천하자는 취지다. 임 대표는“육식으로 인해 가축들의 배설물이 엄청나게 나와 기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채식에 도전하면서 기후 문제에도 관심을 더 가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꽃피는 4월 밀익는 5월’의 비건 빵들. 블로거 ‘울이삐’ 제공 ‘꽃피는 4월 밀익는 5월’의 비건 빵들. 블로거 ‘울이삐’ 제공

■진정한 미식 도시가 되려면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자체들은 채식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눈을 뜬 지 오래다. 서울시는 2014년부터 매주 금요일 점심에 구내식당에서 채식 식단을 제공하고 있다. 창원시는 월 2회 실시하던 채식의 날을 2023년부터 월 3회로 확대했다.

 경남교육청은 유치원과 각급 학교에 월 2회 채식 급식을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도 경남 김해시, 진주시, 거제시, 통영시, 고성군 등의 지자체는 한 달에 1~2회 ‘채식의 날’을 정해 채식 식단을 제공한다. 2025~2026년을 ‘강원 방문의 해’로 정한 강원도는 발 빠르게 비건 여행객 유치에 나섰다. 강원관광재단 관계자는 “비건은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건 어게인’ 프로젝트를 통해 전 세계 비건 여행 수요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2021년 부산에서는 지역 채식 식당을 꼼꼼하게 소개한 ‘부산 비건 지도’가 민간 차원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글로벌 미식 관광도시를 꿈꾸는 부산시는 채식 분야에서는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돼지국밥과 생선회, 밀면은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 음식을 그대로 채식주의자에게 내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난해 부산을 방문한 이현우 씨는 자신의 브런치 스토리에 “부산의 로컬 비건 음식이 있으면 좋겠다. 부산처럼 비건 음식점이 많지 않은 도시라면, 지자체나 관광공사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별도의 안내나 도움이 필요하다. 해초비빔밥 같은 부산에서 나는 식물성 해산물로 요리한 비건 음식이 나오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다. 채식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한 때이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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