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세상의 모든 아침을 위하여

입력 : 2025-05-29 17: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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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

마랭 마레. 위키미디어 마랭 마레. 위키미디어

“나는 아무것도 작곡한 적이 없어. 내 음악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이름, 즐거운 날들의 회상, 비에브르 강을 흐르는 물, 강가의 개구리밥, 쓰디쓴 쑥,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꿀벌, 그런 것들이 내게 가져다주는 선물일 뿐이지.” 알랭 코르노 감독의 ‘세상의 모든 아침’이라는 영화에서 생트 콜롱브는 제자가 된 마랭 마레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흔히 고음악으로 분류되는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클래식 초보자에겐 아득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발디, 바흐, 헨델 정도? 조금 더 간다면 스카를라티, 몬테베르디, 퍼셀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명인은 수없이 많이 있다.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에 살았다는 생트 콜롱브와 마랭 마레라는 음악가 역시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남쪽물고기자리 알파별’ 정도로 생소한 이름이었다.


마레의 '성 주느비에브 성당의 종소리' 앙상블 판타스티쿠스 마레의 '성 주느비에브 성당의 종소리' 앙상블 판타스티쿠스

그러나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상의 모든 아침’이 나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1992년 세자르상 7개 부문을 휩쓴 이 작품은 개봉 첫해 프랑스에서만도 200만 장의 티켓이 팔렸다. 영화의 명성이 조용히 번져가면서 고전-낭만주의 음악에 치우쳐 있던 음악 감상이 바로크음악 붐으로 이어졌다. 영화에 사용된 고음악은 CD로 발매되어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 넘게 팔렸고 지금까지도 계속 재발매되고 있다. 음악을 맡은 고음악 연주자 호르디 사발 역시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초야에 묻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던 생트 콜롱브에게 구두 수선공의 아들 마레가 찾아와 음악 배우기를 청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생트 콜롱브의 제자가 되었지만, 출세에 목적이 있는 마레는 스승을 버리고 화려한 궁정 악사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음악계 최고의 권력자인 장 바티스트 륄리의 눈에 들어 왕립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후, 륄리가 죽으면서 직책을 이어받아 음악계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당시로선 드물게 72세까지 살면서 500여 곡의 음악을 작곡했다. 마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이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쳐 차례로 악장직을 맡게 했다.

‘성 주느비에브 성당의 종소리’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왕실의 화려한 옷을 입은 마랭 마레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곡이다. 늙은 마레는 단원들에게 이 곡을 가르치면서 스승이 가르쳐준 진실된 음악의 길을 떠올리게 된다.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아침은 오지만, 한 번 지나간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멋진 말이 위대한 음악과 어우러진 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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