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그림자 함대

입력 : 2025-06-12 17:5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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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빛과 함께 존재하는 그늘(그림자). 드러나지 않은 채 주기적으로 선출되어 바뀌는 공직자들을 뒤에서 움직이는 조직, 음모론에서는 ‘그림자 정부’라 부른다. 요즘처럼 한낮 볕이 따가운 날에는 오히려 그늘이 반갑기도 하다.

통상·해운 분야에서는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상황도 있다. 서방에게서 오래 전부터 침략자로 낙인찍힌 러시아 처지가 그렇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2022년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이중삼중 제재를 받고 있다. 서방을 대표하는 G7은 2022년 연말 러시아 원유 가격 상한을 배럴당 60달러로 제한하고, 이를 위반하는 구매자나 운송 선사에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러시아 최대 수출 품목인 원유 거래가 크게 줄어들게 함으로써 러시아 경제에 압박을 가하기 위한 조치였다. 유럽으로 향하는 해저 천연가스관인 노르드스트림도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폭파돼 유럽 판로가 막혔다. 외신 일부에서는 폭파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산 에너지가 중국 인도 터키 등을 우회해 서방으로 판매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서방도 값싼 러시아 에너지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우회 경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러시아 ‘그림자 함대’다. 속칭 ‘함대’로 부르지만 각각 민간 소유 선단이다. 선박 소유 지분 구조가 복잡해 실소유주 파악이 어렵거나, 재보험회사도 모호하게 해두는 방식으로 제재를 피한다.

그림자 함대는 2022년 600여 척에서 2023년 말 1100척 이상으로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G7의 원유 가격 상한 제재 시행 직후부터다. S&P글로벌은 그림자 함대로 활동하는 러시아 탱커가 591대에 이를 것으로 지난해 1월 추정했고, 지난달 유럽연합(EU)은 그림자 함대 189척을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0일 ‘친환경 북극항로 포럼’에서 그림자 함대 이야기가 나왔다. 노후 선박이 대부분인 이 선단의 수리 수요가 상당한데, 부울경 수리조선 업계가 대응할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장사하는 입장에 손님을 가려 받기 쉽지 않고, 수리하러 온 선박이 그림자 함대인지 아닌지 민간이 구분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서방과 러시아 갈등이 더 깊어진다면 언감생심이다.

앞으로는 막고, 뒤로는 거래하는 이중성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나? 캐나다 G7회의에서 진전이 있을까?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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