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보랏빛 성

입력 : 2025-06-22 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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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아버지는 은퇴 후 몇 년 동안 강원도 산골짜기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사셨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올 법한 산골이어서 한 번 찾아가려면 해외여행을 하는 정도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도시에서 멀어진 만큼 훼손되지 않은 자연 풍경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소였지만, 그만큼 원시적인 삶의 불편함도 모두 감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어느 여름날, 우리 가족은 모처럼 동생네 가족과 휴가 날짜를 맞추어 아버지 집에 모였다. 집은 작았으나 그 앞에 너른 공터가 있었기에 텐트를 치고 자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도시 여자’인 나와 올케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환경이었다. 잠자리도 그렇고 화장실도 그렇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당연히 위생은 포기해야 했고,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다채로운 벌레들은 기본 옵션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세 명의 꼬마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먹고 씨를 아무데나 뱉어도 되고, 층간소음 걱정 없이 마구 뛰어다니고 소리를 질러도 되고, 심지어 할아버지가 심어놓은 나무 아래 아무데나 가서 바지를 내리고 쉬를 해도 된다고 하니 ‘도시 꼬마’들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도시에선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던 일들이 그곳에서는 더 이상 금기 사항이 아니었다. 꼬마들은 시골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순간 주어진 자유에 빠르게 적응하고 즐거워할 뿐이었다.

단순한 현상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진심을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

얼마 후, 뛰어놀던 세 꼬마 중에 막내 조카가 조금 지쳤는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양은냄비에 담겨져 있던 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오물오물, 작은 입으로 야무지게도 먹는다고 생각하며 인형 보듯 바라보았다. 원래도 인형처럼 생긴 아이인데다 막내는 언제나 더 귀여운 법이니까. 그 귀여운 꼬마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괜히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포도알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막내조카에게 나란 존재는 오랜만에 보는 낯선 어른일 뿐이고, 특별한 친밀감 없이 그저 고모라고 하니 그렇게 부를 따름이었겠지만, 그래도 내 친절이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고 건네주는 포도도 잘 받아먹으며 내 옆에 줄곧 앉아 있었다. 먹고 남은 포도 껍질을 바닥에 하나씩 쌓아두면서. 저 조그맣고 예쁜 손으로 포도 껍질도 한 곳에다 예쁘게 두는구나 싶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내조카가 양은냄비의 포도를 다 먹었을 때 나는 그 애가 쌓아둔 포도껍질을 두 손으로 모아들고 음식물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다. 그러자 막내조카가 갑자기 뾰로통한 표정이 되더니 제 엄마에게로 가서 무슨 말인가 한참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조카에게 다가갔다. 그랬더니 그 애는 작은 두 팔로 잘 만들어지지도 않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한쪽으로 휙 돌려버렸다.

나중에 올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막내조카가 나에게 단단히 토라진 이유는 포도껍질 때문이었다. 자기가 힘들게 성을 만들었는데 그걸 고모가 마음대로 부수었다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그 애는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자신만의 보랏빛 성을 쌓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가 쌓은 성을 무지막지하게 부수어버린 파괴자였다. 모처럼 만난 귀여운 조카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썼던 시간, 조심스럽게 쌓아둔 친밀감과 유대감, 그런 것들을 내가 한 순간에 깨뜨렸음을 그제야 알아채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단순한 현상만 보느냐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진심을 보느냐에 따라, 쌓여있는 포도껍질은 음식물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보랏빛 성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다시 여름의 시작이다. 후회 없이 돌아오는 계절처럼, 내가 무너뜨렸던 성도 다시금 쌓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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