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윤리의 기본은 ‘염치’(廉恥)다.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들이 사라지면 국가는 흔들리고 국민들은 고통에 빠진다. 이 때문에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이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 몰염치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몰염치를 넘어 ‘무치’(無恥), 부끄러움을 숨기려 하는 마음이 부끄러움의 당위를 외면해 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다시금 조명받고 있다. 오래된 정치 관행인 출판기념회는 경조사로 분류돼 책 한 권의 정가도 정할 필요가 없으며 수익 역시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 또는 부정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 까닭에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만들어내는 기회라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출판기념회를 폐지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자성도 나오기도 한다.
일종의 악습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 정치에서 염치가 작동한다면 이는 오히려 정치 후원이 양성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무치의 출판기념회’가 아니라면 말이다.
최근 부산에서는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한 현직 구청장 A 씨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예비후보 등록 전후로 출마 선언과 동시에 출판기념회가 열려 온 그간의 부산 정치권 관례를 고려하면 상당히 이른 시점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구청장 예비후보 등록의 경우 선거일 90일 전부터 가능한데, A 씨의 출판기념회는 2026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부터 340여 일을 앞두고 열렸다.
이재명 대통령을 배출한 더불어민주당이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권력 탈환 의지를 이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할 A 씨의 행보는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역 야권에서는 그가 받고 있는 재판과 연결 짓는 시선이 주를 이루는 모습이다. A 씨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데, 이번 출판기념회가 다음 지방선거에 출마할 수 없는 경우의 수를 고려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는 단순히 여권뿐 아니라 A 씨의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에서는 물론, 그가 기반으로하고 있는 해당 지역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이야기다.
특히 A 씨의 이같은 결단을 두고 지역 야권의 시선은 더욱이 고울 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이 김 후보자를 향해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는 데다 23일에는 이례적으로 광역의원들까지 나서 공세 대열에 합류할 계획이지만 A 씨의 이러한 행동이 단일대오를 이탈한 것은 물론, 정치의 중요한 요소인 명분 차원에서도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