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대통령의 영어 실력

입력 : 2025-06-22 18:05:27 수정 : 2025-06-22 19: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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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지도자의 자질로 영어가 은근히 주목받는다. 지난 대선에서 유학파 후보군이 외신 인터뷰를 선거에 활용한 이유다. 역대 대통령 중 독학으로 영어를 익힌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상위권에 속한다. 2023년 개봉한 다큐 ‘길 위에 김대중’에는 1980년대 미국 망명 시절 DJ가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면이 나온다. 노련하고 치밀한 화술로 토론을 주도하는 장면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탄핵된 두 전직 대통령(박근혜·윤석열)도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해 기립 박수까지 받았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어를 고집해 “미국이 싫어 영어 연설을 피한다”는 공세에 직면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캐나다 G7 정상회담에서 외국 정상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해 화제다. 통역 없이 친근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한 모습에 과거 이력까지 소환됐다. 경기도 성남시장 시절 방송통신대 영문과에 진학했고, 원서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를 한국어로 번역, 출간한 경력까지 재조명됐다. 한국 대통령이 언어 장벽 없이 국제 무대를 누비는 모습은 국격과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다. 다만, 가벼운 스몰 토크와 스킨십 등 격의 없는 상황과 공식 회담은 구분돼야 한다. 영어 실력이 도리어 독이 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면교사다. 올 2월 젤렌스키 대통령의 백악관 정상회담은 외교적 참사였다. 미국 측의 도발에 말려들어 언쟁과 고성을 쏟아낸 탓이다. 통역이 있었다면 발언 사이에 생각할 틈을 갖고 신중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한국 정치인의 영어 인터뷰는 비문과 발음 논란이 반복된다. 사적인 대화라면 몰라도 격식 있는 자리에 부적합하다는 지적이다. DJ도 정상회담 때는 통역 대동을 원칙으로 했다. ‘내수용’이라는 조롱까지 받은 노 대통령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과 이라크 파병으로 한미 동맹 강화라는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외교적 성과는 국익을 지키는 전략과 협상력, 상대를 존중하는 의전과 격식에 좌우된다. 대통령의 영어 실력은 중요한 자산이지만 국익을 보장하지 않는다.

새 정부가 네덜란드 나토 정상회의 참석 여부를 장고하다 결국 불참을 결정했다. 나토 정상회의는 한미 정상회담, 유럽 방산 수출 확대 등 한국의 실리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견제와 우크라이나 지원 같은 민감한 현안에 대한 입장 전환이 부담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중동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국가의 전략적 판단이 정교하게 가다듬어져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정제되어 나와야 하는 게 외교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스몰 토크로는 완주할 수는 없다. 영어 실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국익을 지키는 능력이 우선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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