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로부터 촉발된 것이었다고 해도 이재명 정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를 한 차원 더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나락으로 갈 수 있는 위기가 짧은 기간 끊임없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정상적인 민주 절차에 따라 피를 흘리지 않고 국가의 회복력을 만방에 보여준 것만 해도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대한민국 브랜드의 가치가 올라가는 사이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주류 세력의 교체가 이뤄졌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간 우리 사회는 산업화의 자산을 등에 업은 세력이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도 1987년 여타 세력과의 타협으로 새 헌정질서를 수립하고는 주류를 이뤄왔다. 그러던 것이 이번 정권 교체로 기존 주류 세력의 퇴조와 여타 세력의 주류화가 뚜렷해진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세력이 새 시대정신을 앞세워 강력하게 도전하지 않는다면 여타 세력에서 현 주류로 공고해진 세력의 교체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새로 공고해진 주류 세력은 아직도 자신들이 주류 세력이 된 것을 모르고 거친 도전의 언사를 주로 사용하고 퇴조하는 기존 세력도 자신들이 주류 세력인 양 허세를 부리는 중이다. 주류 세력의 완전한 교체와 그에 따른 적절한 자리매김에는 시행착오와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류 세력이 교체된 만큼 기존 산업화 자산을 토대로 한 대한민국의 정책도 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할 것이다. 대선 기간 토론회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정책 구상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복기해 본다면 새 패러다임은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구상에는 그 구상의 씨앗이 된 생각들이 분명히 있다. 다행히 이 대통령은 한 책자에 이 같은 씨앗을 뿌려놓았기에 이를 살펴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어 반가웠다.
몇년 전 인구에 회자되다 잠시 잊힌 그 책자는 이 대통령이 경기도지사 시절 이한주 경기연구원장(현 국정기획위원장)이 주도해 만든 〈모두의 경제적 자유를 위한 기본소득〉(2020)이다. 부산으로 치면 부산시장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산연구원장이 여러 연구자들을 모아 만든 기획성 책자와 같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이 책자는 경기도에서 행해졌던 청년기본소득정책과 재난기본소득 등 기본소득 관련 정책에 대한 설명과 효과 분석을 골자로 기본소득에 대한 광범위한 이론적 토대와 해외 사례 등을 두루 담고 있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 등 국내 기본소득 관련 전문가들을 총망라한 듯한 다양한 저자들의 다채로운 시각과 이론이 눈을 끈다. 국내외 논란은 논외로 하고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 시대를 맞아 노동의 소외로 인한 제반 문제를 기본소득으로 돌파해 보려는 시도 분석은 일단 흥미롭다.
하지만 책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국민 1인당 월 60만 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하려 해도 한 해 예산만 360조 원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이 책자에서는 전액은 아니라 하더라도 필요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재원 조달 방법을 다양하게 구상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공공 영역을 기반으로 한 각종 배당권이다.
책자에서는 국유재산 수익 배당권을 가장 앞머리에 내세운다. 2018년 기준 1100조 원에 달하는 국유재산을 활용해 연간 1%의 수익을 올린다 해도 10조 원의 배당 수익이 발생한다는 식의 개념이다. 대표적으로는 아파트 공공개발과 공유주거, 공유주방, 스마트팜과 태양광 발전 등을 통한 국민 배당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 같은 배당권의 기본적 얼개에 대해 책자는 ‘공유지 수익 나누기’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유지는 고전 경제학이 이야기 하는 토지의 개념을 넘어 선다. 4차 산업 시대에 걸맞게 공동체 성원들의 협력으로 생산된 빅데이터나 새로운 지식 같은 무형의 자산까지 모두 공유지로 보고 이를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사용권과 수익권을 갖는 공동소유 자산으로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을 강조한다. 대선 과정에서 나온 국부펀드 방식 공공형 엔비디아급 IT회사 설립과 이를 통한 국민 배당 등의 이 대통령 주장은 그 이론적 배경이 아마 여기에서 나온 듯했다.
책자는 기본소득을 염두에 둔 서술이므로 이재명 정부의 정책과 곧장 연결짓는 건 견강부회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4차 산업 시대를 맞아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한 이재명 정부가 공공 영역을 고리로 어떤 구상과 시도를 할 것인지를 엿보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하겠다. 관심 있는 이들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