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성격이 팔자’라는 우리 속언과 호응하며 지금까지 꽤 설득력을 얻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서는 존재에 관한 추측만 무성할 뿐 전해지지 않았고, 그의 말들만 조각으로 인용되곤 한다. 그래서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그의 말은 대부분 출처 없이 여러 말과 글에 등장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을 참고하면, 이 말의 원문은 ‘성품(ethos)이 곧 수호신(daimon)이다.’
원문과 떠도는 인용이 다소 다르다. 먼저 에토스(ethos)를 성격으로 번역할지, 성품으로 번역할지가 문제이다. 성격은 타고난 성질이나 기질이기에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성품은 성격이란 바탕 위에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개인 특성이기에 교육, 경험, 관계 등 다양한 요인으로 변화하며,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형성된다.
윤리학(Ethics)의 어원이 에토스이고, 옥스퍼드사전에서 에토스를 개인이 지니는 도덕적 생각과 태도라고 정의했으니, 에토스는 성격이 아니라 성품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만약 성격이 운명이라면, 우리는 이미 운명을 타고난다는 뜻이고, 성품이 운명이라면 운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글자 하나로 뜻이 완연히 바뀐다. 만물 유전설로 알려진 헤라클레이토스라면, 변화 가능성이 희박한 성격이 곧 운명이 된다는 주장을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 다이몬(daimon)에 관한 번역도 문제다. 다이몬은 악마를 뜻하는 ‘데몬(demon)’의 어원이지만 본디 반인반신의 생물로 악마와 천사를 함께 품은 모순의 존재이며, 책에서는 ‘수호신’으로 번역했다. 다이몬의 번역은 다양하며, 그중에서 ‘운명’이란 의미가 있다. 다이몬은 사람일지 신일지, 천사일지 악마일지, 섣불리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운은 운인데, 그것이 행운일지 불운일지, 인생에서 좋고 나쁜 것은 명확하지 않다. 화가 복이 되기도 하고,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다.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에 인용된 원문은 ‘성품(ethos)이 곧 운명(daimon)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바른 성품을 갖추지 못한다면, 좋지 않은 운명을 맞아야 마땅하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인지생야직 망지생야행이면(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사람의 인생은 곧아야 한다. 곧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면 요행히 화를 면하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직(直)이 에토스가 강조하는 윤리적 생각과 태도, 즉 바른 성품을 뜻한다. 직(直)의 반대말이 곡(曲)이다. 곡학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자가 잘 살고 있다면 운이 좋아 화를 면하고 있는 것뿐이다. 운이 좋은 것도 한두 번이다. 결국 전 생애에 걸쳐 좋은 운명을 원한다면 바른 성품을 지녀야 한다.
바른 성품은 마음(heart)과 정신(mind), 의지(will)로 형성된다. 공감과 연민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친절하고 관대함을 잃지 않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배움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기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지적 겸손을 갖추어야 공자가 직(直)을 강조하되 경직(硬直)을 경계했던 이유를 깨닫는다.
인생은 늘 반듯할 수 없다. 그래서 곡절 없는 인생이 없다고들 한다.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힘들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기 통제력(self-control)을 갖춘 의지가 있다면, 그리하여 바른 성품을 스스로 형성할 수 있다면, 성품이 곧 원하는 운명이 될 수 있다. 내 성품이 내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