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산시립박물관에서 ‘큰별쌤’으로 유명한 최태성 역사 강사를 만났다. 최 강사는 광복 80주년 기획전이 진행 중인 부산 박물관에 특강하기 위해 찾았다. 박물관 대강당이 가득 찰 만큼 사람이 많이 왔고, 최 강사는 ‘그날을 만든 사람들-부산의 독립운동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대형 화면에 ‘위대한 사랑의 역사’라는 큰 글씨가 적힌 영상이 비치고 있다. 최 강사는 “오늘 저는 위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부산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뜬금없이 무슨 사랑 타령인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최 강사는 1시간 30분 동안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에 나가기 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기록이다. 영화 ‘밀정’에서 이정재 배우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을 연기한다. 독립운동 동지가 변절의 이유를 묻자 “독립이 될 줄 몰랐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당시 많은 지식인, 지도자가 독립은 포기하고 일제와 타협해 조금 더 편하게 사는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독립운동가는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독립된 세상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고 폭탄과 함께 뛰어들었고, 살아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도 타협 없이 죽음을 택했다. 그 마음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후손들은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앞서 싸운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 역시 앞서 싸운 이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것이다.
최 강사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여성가족부의 탄생 상황을 회상하다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사랑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5년 부산일보에 입사해 처음 맡은 분야가 ‘여성·가족’이었다. 30년 전 ‘여성·가족’ 기사는 대체로 ‘슬기로운 주부 생활’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족 돌봄과 알뜰한 살림은 주부의 일이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같은 직종, 비슷한 경력에도 남성 직원이 여성보다 승진, 연봉에서 유리했던 차별 상황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돌봄, 젠더 폭력, 차별 등을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정책을 펼칠 독립 부처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인권 운동, 여성 운동, 시민 운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여성부 설립을 위해 국민 서명을 받았고 집회도 열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어려움이 많았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며 선배들은 광장에서 몸과 마음을 다쳐 가며 싸웠다.
그렇게 2001년에야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부는 정권마다 위상이 크게 출렁였다. 남성 표심을 잡기 위해 ‘여가부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온 윤석열 정부 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대에 부딪혀 부서를 폐지하진 못했어도, 16개월째 장관을 공석으로 두며 여가부는 사실상 ‘식물 부서’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윤 정부 3년간 남성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그렇지도 않다. 청년층의 고립, 구조적 차별은 심해졌고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압박도 여전히 크다. 모든 국민이 보는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버젓이 여성 신체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후보를 국회의원에서 제명시키자는 청원이 6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가 그 발언이 성폭력이라는 걸 사전에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를 확대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성평등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성평등가족부로 확대해 차별과 혐오, 고립과 폭력을 걷어내고, 다양성과 돌봄, 공동체를 회복하는 국가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 소멸 위기에서 출생은 한 가족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돌봐야 할 일상의 단위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정권 변화에 따라 예산도 인원도 정책 방향마저 흔들리던 여가부 잔혹사는 이제 끝나야 한다. 다시 한 번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국민이 공정과 평등을 누리는 세상을 열어 보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