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임꺽정'이 고국으로 돌아온 시간, 64년

입력 : 2025-07-16 17: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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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미국에서 발견한 유현목 영화
4K 복원해 최근 국내 상영회
아카이빙 중요성 새삼 되새겨

유현목 감독의 '임꺽정' 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유현목 감독의 '임꺽정' 스틸컷.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 영화 중 본 사람은 많은데,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입으로 전해지는 영화가 꽤 많다. 그중 이만희 감독의 ‘만추’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다. 제17회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휩쓴 영화는 당시의 인기와 흥행을 고려하면 필름이 사라진 것이 이상할 정도다. 영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0년대를 대표하는 김기영, 김수용 감독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를 리메이크했으며, 2011년에는 이 영화를 본 적 없던 김태용 감독이 ‘만추’를 연출한다.

김태용 감독은 리메이크작들을 참조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했다. 영화 공간을 시애틀로 옮기고, 한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사랑으로 바꾸는 등 원작과는 다른 ‘만추’를 완성했다. 하지만 사건과 시공간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쓸쓸하고 고독한 늦가을의 정서는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감독은 이 영화로 그해 열린 영화 시상식에서 감독상,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여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와 결혼까지 하면서 여러 이슈를 낳았다. 유실된 한 편의 영화가 현실의 영화와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 한국영화사에서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오래 간과해 왔음을 알려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실된 한국영화 찾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배운다. 지난 6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의전당 등에서 진행되었다. 우리에게 유현목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소설의 이야기를 빌려와 영화로 옮기는 단순 작업을 하지 않았다. 각색을 통해 전쟁 이후의 허무와 절망, 실존적 고독을 담아냈으며, 국가정책에 부합하는 반공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 속에 비판적 목소리를 포함시키며 한국 영화를 한 단계 나아가게 만든 감독이다.

감독은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 ‘순교자’(1965), ‘카인의 후예’(1968) 등으로 독보적인 연출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5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인 그에게도 사라진 영화가 있는데, 그것은 1961년 12월 개봉한 ‘임꺽정’이다. 이 영화는 당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끌었음에도 필름을 찾을 길이 없었다. 어딘가에 필름이 있다고 해도, 필름을 보관하는 일이 워낙 까다롭기에 대부분은 이제 ‘임꺽정’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가운데 2022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임꺽정’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영화는 4K 디지털 복원 과정을 거쳐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임꺽정’ 역시 홍명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당대 사회를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유현목 감독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임꺽정’은 기존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의적 ‘임꺽정’(신영균)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위해 탐관오리를 무찌르는 이로운 인간이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의적의 이야기이니 무겁고 진지하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사극 액션 장르로 통쾌하고 재미있다. 어찌 보면 오락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나면 그저 웃고 지나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유현목 감독은 ‘임꺽정’을 단순한 액션물로 만들지 않았다. 영화에는 양반들이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있다. 이때 감독은 양반들이 다리를 잘 건널 수 있게 다리 밑에서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백성임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실제 이 현실을 지켜온 존재가 누구인지 알기에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64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우리 곁으로 돌아온 영화 ‘임꺽정’을 보며,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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