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행동할 힘을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사바나와 산’(Savanna and the Mountain)으로 지난해 제77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파울루 카르네이루(Paulo Carneiro) 감독의 말이다.
지난 21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개막한 제4회 하나뿐인지구영상제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를 23일 오후 영화 제작사 케이드래곤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의 영화는 25일 열린 폐막식에서 대상작으로 호명됐다.
‘좋은 마을, 나쁜 자본, 그리고 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관객에 첫선을 보인 영화는 영국 자본이 들어와 유럽 최대 규모의 노천 리튬광산을 개발하려는 포르투갈 북부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이다. 거대 자본과 맞서며 일상이 위협받는 상황을 긴장감과 유머가 공존하는 재연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배우로 나섰다. 장르로 구분하자면 다큐와 픽션이 혼용된 하이브리드 영화인 셈이다.
부모님 고향과 가까운 마을의 일이라 관심을 가졌다는 그는 “처음엔 단순히 인터넷에 올려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외부에 알릴 생각으로 촬영과 인터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직접적으로 광산을 개발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산악용 오토바이를 탄 청년 두 명이 마을 곳곳을 휘젓고 다니는 장면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카르네이루 감독은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 겪는 오토바이 소음은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느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라며 “이를 통해 관객들이 일상을 위협당하는 주민들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장치는 자신의 영화 철학과도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카르네이루 감독은 “흑과 백처럼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언론의 영역에 가깝다”라면서 “제가 생각하는 영화의 영역은 흑과 백이 아닌 회색, 즉 경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대신 그는 웨스턴무비 기법을 적극 활용해 영화적 재미를 담보하면서 미국 서부 개척 시대로 회귀한 듯한 마을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알리려 노력했다고 한다. 서부극 특유의 경쾌하고 단순한 리듬의 음악과 굵은 고딕에 다이아몬드형 돌출을 새긴 제목 서체부터가 그랬다. 또 백마를 탄 남성과 마차, 현상금 벽보, 총을 등장시켜 피 한 방울 없이 광산 개발이 불러올 비극을 경고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홍상수나 이창동 감독 등을 언급하며 한국 영화에 관심을 나타낸 카르네이루 감독은 특히 홍상수 감독이 2016년 칸영화제 기간 촬영해 이듬해 칸에서 특별상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를 인상 깊게 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백만 명에서 1000만 명 이상 관객이 드는 한국 영화 시장을 부러워했다. 그는 “미겔 고메스 같은 유명 감독의 작품도 1만 5000~2만 명 정도밖에 보지 않는다”라며 포르투갈 영화 시장이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2018년 첫 장편을 선보인 카르네이루 감독은 이번 작품까지 세 번 연속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상업영화 촬영 계획은 없을까? “영화인도 각자의 역할과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잘 모를뿐더러 포르투갈에는 봉준호 감독 작품 같은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 돈이 없다”고도 말했다.
칸에 이어 전 세계 40여 개 영화제에서 초청된 그의 작품은 9월 26일 개막하는 제10회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 국제경쟁 부문에도 초청돼 한국을 다시 방문할 예정이다. 다음 작품 준비를 위해 최근엔 해외 영화제 참석을 자제한다는 그는 "한국이 아니었으면 아마 참석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카르네이루 감독은 “제 작품이 비록 많은 관객이 보진 않았지만, 이번처럼 여러 나라에 초청돼 널리 소개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카르네이루 감독은 제4회 하나뿐인지구영상제에 직접 참석한 유일한 해외 감독이다. 지난 21일 열린 개막식부터 현장을 누빈 그는 폐막일인 25일 두 번째 상영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GV)를 갖고 자신의 영화 철학과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음 작품도 아프리카의 한 지역을 배경으로 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라며 “하나뿐인지구영상제 주제와도 잘 맞을 것 같다”라며 재초청 희망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