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노란봉투법 마주한 '가짜 사장들'을 위한 항변

입력 : 2025-08-31 18: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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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경제부장

논란 끝 새 노사 관계 기준 마련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 과정 없어

하청, 원청·노조 사이에 낀 신세
법 안착해도 또 다른 문제 불가피
‘성장 주역’ 자부심 잃을까 걱정

사각지대 메우는 입법 보완 필요

10명가량 둘러앉은 최근 저녁 모임에서 A 씨는 노란봉투법 얘기를 여러 번 꺼냈다. 자동차 협력사 대표인 A 씨 얘기에 개인 사업자이거나 월급쟁이인 동석자들은 “기업들이 외국으로 다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 “하루가 멀다 하고 파업으로 날 새게 생겼다” 같은 말로 맞장구를 쳤을 뿐, 대화는 번번이 다른 화제로 옮겨 갔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 A 씨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20년 노동계 숙원인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 6개월 유예기간을 거쳐 시행에 들어간다. 수많은 근로자와 기업에 영향을 미칠 새 노사 관계 기준이다 보니 숱한 논란과 갈등이 벌어졌지만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는 거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직접 당사자인 중소 하청업체 목소리가 전혀 담기지 못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다. 출범 3개월 만에 노란봉투법을 밀어붙인 정부여당과 노동계의 기세에 눌려서일까. 하청업체 목소리는 이따금 언론에 ‘익명의 하청업체 대표’ ‘기업 관계자’로 등장해 “원청 파업이 잦아지면 회사 운영이 될지 모르겠다”거나 “원청에서 계약을 끊을까 걱정”이라는 하소연 정도로 전해졌다.

당장 경제계가 우려하는 것처럼 해외로 생산시설을 옮기는 ‘코리아 엑소더스’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도 대기업이나 외투 기업에 해당되는 일이지 국내에서 공장을 옮기려 해도 직원 눈치를 살펴야 하는 중소 하청기업엔 ‘남의 일’일 뿐이다.

대신 기업인들은 향후 고소고발이나 파업이 잦아질 것이라 보고 살길 찾기에 나선 분위기다. 법조계 판단도 다르지 않다. 국내 주요 로펌들은 법 통과 이후 노사관계 대응팀을 꾸리고 노란봉투법 관련 세미나를 연이어 열며 호응했다. 세미나마다 1000명 안팎의 기업인이 몰렸고, 제조 부문 기업 관계자 발걸음이 많았다는 전언이다.

특히, 제조업을 산업 근간으로 한 동남권의 중소 협력사들은 타 지역보다 걱정이 더 크다. 원·하청 구조가 강고한 조선 자동차 기계 철강 등이 부울경에 몰려 있다. 이런 종속관계는 한때 ‘수출강국 대한민국’을 만드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청기업들은 단가 후려치기 등 원청 횡포에 항변도 못한 채 한국 제품 가격 경쟁력 유지에 일조했다. 대기업은 돈을 벌어도 이윤을 나누는 일에는 인색했다. 그들이 지금 와서는 다단계 하청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란봉투법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만났을 뿐이다.

노사가 교섭 테이블에 앉아도 문제 해결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사용자 범위 확대’ ‘교섭·쟁의 대상 확대’ ‘손해배상·가압류 제한’ 등 노란봉투법 조항들이 모호하고 다툼의 여지가 많다는 평가가 노사 모두에서 나온다.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사용자 여부를 가리는 일부터 책임 범위,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사안마다 장기 법적 분쟁이 이어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노란봉투법이 순조롭게 자리 잡아 노동자 권리가 신장돼도 하청기업들은 더 힘겨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원청이 권한과 교섭권이 강화된 하청 노동자와 직접 교섭을 벌이는 한편 그 손실은 원가 절감을 요구하며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상황도 예상된다. ‘대화의 장’에 끼지도 못하는 하청기업들은 인건비 상승, 파업 리스크, 원청과의 거래 단절까지 걱정할 판이다.

노사 갈등이나 제도 개선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하청업체엔 더 암울한 상황이다. 노란봉투법 성공 여부는 법률의 모호함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그 과정을 얼마나 단축시키냐에 달렸다. 정부와 노동계도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법을 시행한 뒤 문제 있으면 고치자”는 정책 핵심 당국자 언사는 지나치게 안이하다. 대립이 격화된다면 하청 중소기업 현실까지 고려될 기회는 더 줄어든다.

무엇보다 일순간 추락한 하청업체 기업인들 자존심은 어떻게 살려야 할지 걱정이다. “진짜 사장이 나서라”는 노동계의 외침에 수십 년 한국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수많은 중소 기업인이 ‘가짜 사장’ 신세가 돼버렸다. 직원 월급 주려고 은행을 쫓아다니며 손을 벌리고, 제품을 개선하려고 국내외를 찾아다닌 노력은 노란봉투법에 짧은 수식어로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인 사람’으로 치부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계는 정부에 입법 보완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예기간 6개월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담길 수 있을지 우려한다. 사용자 범위, 노동쟁의 개념, 경영상의 권한 침해 여부 등 하나하나가 논란과 갈등의 요소인 만큼 보완책이 나온다 해도 부정적 영향이 제대로 제거될지 미지수다. 정부와 노사가 또 다른 ‘힘의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경제 주체를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로 최선의 해법을 내주길 기대한다.

김영한 기자 kim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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