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규슈의 작은 도시인 미야자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는 부산에서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일본 국내선을 타고 다시 40분을 가야 도착하는 작은 도시이다. 지역의 건축가들과 함께 도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특산물인 삼나무로 지은 철도 역사였다. 역사의 주요 구조뿐만 아니라 역 내부에 위치한 자전거 거치대까지 삼나무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역의 뜨거운 여름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랑 같은 역사의 넓은 공간은 지역 축제를 비롯하여 어린이 집 전시회 등 다양한 지역 활동의 주 무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플랫폼은 기차를 타는 기능 외에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치 건축물 하나로 미야자키 전체를 설명하는 듯하였다. 이것이 도시의 경쟁력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디자인수도 걸맞은 실험 이어져야
다양한 분야 시민참여형 프로젝트 도입
공간의 질과 지역 미래 경쟁력 높여가길
도시의 경쟁력을 경제력이나 인구 규모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는 지난 듯하다. 도시의 경쟁력은 디자인과 공간의 질 그리고 활용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 국제 프로젝트가 바로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WDC)이다. 세계디자인수도는 단순한 도시 미관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사회·문화·경제적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평가를 통해 선정된다. 그간 헬싱키, 케이프타운, 타이베이, 멕시코시티, 발렌시아, 세종, 상파울루 등이 세계디자인수도의 이름을 거쳐 갔다. 이들 도시는 디자인을 사회 혁신의 도구로 활용했다. 예컨대 2012년 헬싱키는 ‘시민 생활 중심 디자인’을 기치로 내걸며 공공도서관과 공원, 교통 체계를 시민 눈높이에 맞게 개선해 북유럽식 복지 도시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2014년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디자인으로 풀어내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불평등한 도시구조 속에서 시민 참여형 거버넌스를 강화하며 ‘디자인이 사회통합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2016년 타이베이는 첨단 ICT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시티 구축과 생활밀착형 공공디자인 확대를 통해 아시아 도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2018년 멕시코시티는 역사와 문화자산을 보존하면서도 공공공간을 재편해 시민의 일상 경험을 바꿔냈다. 2022년 발렌시아는 해양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건축·도시디자인 전략을 내놓으며 유럽 지중해 도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같은 해 세종시는 스마트 행정도시라는 특수성을 기반으로, 시민 참여형 공공디자인 정책을 강화해 한국형 도시디자인 모델을 구축했다. 가장 최근 2024년 선정된 브라질 상파울루는 세계적 대도시의 인프라 문제를 디자인으로 재구성하며 사회적 불평등 개선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도시들은 핵심 키워드를 기반으로 도시혁신의 실험장이자, 도시의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제 부산이 그 깃발을 이어받았다.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으로 부산 또한 도시의 정체성과 경쟁력을 새롭게 디자인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핵심 키워드, 지역적 특성, 그리고 시민, 디자이너들의 참여와 역할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해양이라는 핵심 키워드 하나만으로 연결되는 디자인은 무수히 많다. 북항 재개발, 영도 해양관광벨트, 수영만 요트경기장 일대 등 주요 공간별로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해양 친화적 건축은 무엇인지, 친환경 해양 레저 인프라를 위한 방법은 없는지 등이다. 그 외 해양 생태와 공존하는 도시디자인,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해양도시 모델 등 각종 키워드를 연결하는 다양한 디자인 활동들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적 특성을 살린 다양한 디자인이 요구된다. 원도심만 보더라도 과거의 흔적과 쇠퇴가 공존하는 곳이다. 영도·초량·동구 일대는 항만과 철도의 기억을 품고 있지만, 인구 유출과 상권 침체로 활력을 잃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보존하고 항만 지역의 역사 문화자원들을 중요한 매개물로 삼아 지역에 새로운 기능을 덧입히는 건축적 재생 전략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디자인은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그 결과는 시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부산이 세계디자인수도로서 진정한 성과를 위해 시민참여형 도시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졌으면 한다. 과거 부산에서 이루어진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인 ‘광복로의 광복’ ‘미로미로 프로젝트’ ‘산복도로 일번지’처럼 주민과 디자이너들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생활권 단위의 공공건축, 15분 도시, 교통체계, 공공디자인, 해양산업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참여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부산의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은 도시의 ‘외형적 치장’이 아니라 도시의 경쟁력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과거와 현재, 지역과 장소,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엮어내는 디자인 실험을 통해 지속 가능한 도시, 부산다움의 시작점을 제대로 구축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