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으로 피란 갔을 때 다섯 살이었는데 산꼭대기 여기저기에 집들이 모여있던 게 기억나네요. 그 뒤로 부산과 인연이 없었는데 이렇게 70년이 훨씬 지나서 부산시향이 제 음악을 연주하니 베를린에서 정말 굉장히 역사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유럽 현대 음악계의 대모로 평가받는 재독 작곡가 박영희 선생은 23일(현지시간) 베를린 필하모니 메인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부산시향의 ‘무직페스트 베를린’ 폐막 공연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독일 최대 클래식 음악축제의 폐막 공연에서 두 곡이나 연주된 것은 그의 창작 세계와 한국 음악의 우수성이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걸맞게 무직페스트 측은 이날 고령으로 몸이 불편한 작곡가를 극진하게 배려했다. 베를린에서 3시간 가량 떨어진 브레멘의 거주지까지 별도로 차량을 보내 모시고 왔으며, 공연장 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공간을 휠체어를 탄 박영희 선생의 편안한 관람을 위해 배려했다.
이 좌석은 독일 내무부 장관을 지낸 볼프강 쇼위블래 전 연방의회 의장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테러로 장애를 입어 일반 좌석에서는 관람이 힘든 쇼위블래 전 의장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공간을 내준 것이다.
박영희 선생은 1944년생으로 충북 청주 출신이다. 서울대 작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1960년대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1974년부터 고국을 떠나 독일에서 유학했다.
이후 프라이부르크 음악원에서 클라우스 후버, 브라이언 퍼니호, 피터 푀르티 등 저명한 음악가 아래에서 공부했으며, 1978년 스위스 보스빌 작곡 콩쿠르와 1979년 유네스코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 1994년 동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 작곡과 주임교수로 임용됐다.
1995년 하이델베르크시에서 여성예술가상을 받았고, 2020년에는 여성·동양인 처음으로 독일 예술원이 수여하는 베를린 예술대상(Großer Kunstpreis Berlin)을 수상했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베를린(독일)=박석호 기자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