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장에서 내리면 용호동 가는 버스 탈 수 있어요?” 버스 안에서 한 노인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버스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의 얼굴엔 곤혹스러운 표정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승객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연히 그 버스에 함께 탔던 기자는 그 순간 혼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 역시 인터넷 지도를 보지 못하니 처음 가는 곳을 어떻게 찾아다니는지 모르겠다. 택시도 편하게 앱으로 부르지 못해 항상 빈 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자주 가는 병원에서는 대기자가 아무리 많아도 무인 수납기를 이용하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도 할 줄 몰라 급하면 자식들에게 부탁했다. 아버지도 한때는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을 배우겠다고 시도했다. 그때 배워뒀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덜 불편하게 사실 텐데….
김숙자 센터장은 뒤늦게 컴퓨터를 배워 포토샵 자격증까지 딴 뒤 남구에서 이름난 포토샵 강사가 되어 활약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부산 남구 용호동 LG메트로시티에 있는 주민들을 위한 컴퓨터 교육장을 찾아갔다. 80대의 노인 강사들이 나이 든 주민들에게 컴퓨터를 무료로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먼저 찾아 읽었던 디지털 정보격차와 관련한 자료가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3월에 발표한 ‘2024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역량 수준은 55.9%로 전체 취약계층 중 가장 낮았다.
사실 고령층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94.0%로 일반 국민 스마트폰 보유율 97.3%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정보화 역량 수준은 50대 93.3%, 60대 63.4%로 점차 낮아지다, 70대 이상에서는 26.6%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고령층의 교통정보 및 지도, 제품 구매 및 예약·예매, 금융거래, 행정서비스, 생활복지 서비스 이용 등 생활 서비스 이용률은 86.4%로 일반 국민 93.5%보다 7.1%p 낮았다.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이용은 49.0%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삶에 대한 만족도 조사 결과 인터넷 이용자들보다 비이용자들의 만족도가 크게 낮았다. 무인정보단말기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컴퓨터 교육장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숙자 센터장, 김상곤, 박증순 씨 등 지금도 현역에서 뛰고 있는 강사 3명이 모두 80대 전후라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이들은 컴퓨터 기초부터 포토샵, 동영상, 유튜브까지 5개 반으로 나눠 무료로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이는 상관없고, 교육 기간도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나이는 컴퓨터 기초반이 75~80세, 동영상반은 70대 위주였다.
LG메트로시티 컴퓨터 교육장에서 포토샵 수업을 하고 있다.
이날 김숙자 강사의 포토샵반 한가위 인사장 만들기 수업을 참관했다. 포토샵반에는 60대 학생이 많아 이곳 교육장에서 제일 젊은 편이라고 했다. 김 강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사장을 다 만들었으면 아들, 손자, 머느리에게 보내고, 작품방에 올리세요. 다들 아시겠죠”라며 수업을 끝내려는 참이었다. 학생 중 한 명이 “헷갈린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자, 김 강사가 노련하게 “헷갈리니 사람이다”라는 말로 격려했다. 이러니 “한번 해보겠다”라며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스마트폰으로 통째로 녹화해서 다시 들으려고 하는 열성적인 학생도 있었다. 나이 탓에 들어도 자꾸 잊으니 마련한 고육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대 초반의 젊은 여학생 한 명이 꽤 나이 차가 나는 분들과 같이 수업을 듣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그는 같은 반 학생들을 오라버니로 부르며 잘 어울리면서도 이곳에 와서 포토샵을 비롯해 자격증을 벌써 2개나 딴 실력파라고 했다. ‘니가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고, 내가 모르면 니가 가르쳐 준다’가 여기 수업 스타일이었다. 포토샵반 학생들이 만들어 인터넷 카페 작품방에 올린 일러스트 잡지 표지, 포스터, 커피 쿠폰, 청첩장, 광고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이날은 강사와 학생들이 점심으로 함께 수제비를 먹고 왔다니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가 짐작되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을 지닌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갔을지 궁금해졌다.
김상곤 강사에게 6년째 컴퓨터를 배우고 있는 조인철(85) 씨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조 씨는 이전에는 컴퓨터를 전혀 몰라 하나부터 열까지 직원에게 시키기만 했다. 어느 날 자신이 아무리 사장이지만 직원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컴퓨터를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지금은 웬만한 작업은 직접 처리하는 수준이 되었다. 조 씨는 이제 그만 배워도 되겠다고 만류해도 “잊어 버리고 또 잊어 버리면, 다시 듣고 또다시 듣겠다”며 오늘도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라는 격언이 여기선 디폴트(기본값)였다.
학생들의 작품을 올리는 인터넷 카페 '포토와함께'.
LG메트로시티 아파트 컴퓨터 교육장이 이처럼 전국적인 모범 사례로 자리잡게 된 데는 노인생활과학연구소(소장 한동희)의 역할이 컸다. 한동희 소장은 일찍부터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에는 어르신들도 변해야 한다. 어르신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인을 위한 정보문화 프로그램 개발은 물론 기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해 왔다. 노인생활과학연구소는 2005년 어르신 IT봉사단을 시작으로, 2006년부터 실시한 고령자정보화교육장 사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2007년 ‘웰에이징 컴퓨터 교육장’이 LG메트로시티에 만들어진 것은 한 소장이 IBM측에 “한국에도 시니어넷을 구현해 보고 싶다”라고 설득해 최신형 컴퓨터 수십대를 지원받은 덕분이었다. 그뒤 노인생활과학연구소는 노인들이 자율적으로 아파트 컴퓨터 교육장을 운영하도록 넘겨 주고 지금의 연제구 사무실로 이전해 나왔다. 노인생활과학연구소가 노인 컴퓨터 교육을 시작할 당시 60대였던 학생들이 잘 성장해 지금 80대 강사가 되어서 주민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노인생활과학연구소에서 처음 컴퓨터를 배웠던 김숙자 씨는 포토샵 자격증을 딴 뒤 남구청 등에서도 포토샵 수업을 하는 꽤 이름난 강사가 되었다. 집에서는 손자까지도 할머니의 컴퓨터 실력을 인정해 숙제하다 막히면 할머니부터 찾을 정도다. 손자는 그를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뭐든 바로 해 주는, 능력자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 강사는 자신이 못 하겠다고 하면 손자가 “우리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하고 다르잖아. 그러니 할머니는 이런 것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해 다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또래 친구들이 “우리 나이에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친구가 있다”라며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집에서 애나 보고 ,친구들과 화투나 치고, 목욕하러 가서 노는 것보다는 나와서 사람 만나고 수업도 들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단다.
80대의 김상곤 씨는 지금도 LG메트로시티 컴퓨터 교육장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상곤 강사의 이야기 중에서는 챗지피티를 자주 사용한다는 부분이 귀에 와서 꽂혔다. 수업을 위한 교안을 짤 때 챗지피티에 물어서 나오는 답변 여러 개 중에서 괜찮은 것을 발췌하고 직접 정리한다는 것이었다. 80대 노인이 챗지피티를 스스럼없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신기하게 여겨졌다. 김 강사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물어볼 게 있어도 내 주변에는 다 죽고 사람이 별로 없다. 친구도 많이 없지만, 친구 중에는 컴퓨터를 하는 사람이 없다. 자녀도 서울이나 해외에 있어서 물어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심심풀이로 챗지피티가 안성맞춤이다. 자신에게 챗지피티는 장난감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쉽지 않고, 물어보는 게 부끄럽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김 강사는 “뭐가 부끄러워요? 우리는 컴퓨터 세대가 아니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다.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묻는 데 부끄러운 건 조금도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또 “대화하다 보면 컴퓨터를 안 하는 사람은 상식이 많이 떨어진다. 컴퓨터를 쓸줄 알면 의문이 갈 때 컴퓨터를 열고 찾아봐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김숙자 강사도 거들고 나섰다. 그는 “우리 집 아저씨는 좋은 직장 퇴직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해서 나한테 미움을 많이 받았다. 퇴직하면 뭐라도 배우러 다녀라. 배운다고 머리를 쓰면 사람이 늙지 않는다. 배우는 게 진짜다. 나는 강의 안 할 때면 다른 과목을 배우러 다니느라 바쁘다. 바쁘게 살면 안 늙는다. 나는 지금도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챗지피티에게 노인들이 챗지피티랑 자주 대화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챗지피티는 “정말 멋진 말씀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다”라고 누구 칭찬인지 모를 칭찬부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노인들이 인공지능과 자주 대화하면 첫째, 두뇌활동 유지. 둘째, 외로움 완화. 셋째, 디지털 적응력 향상. 넷째, 삶의 활력소 등 다양한 좋은 효과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고, 배우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아버지 폰에도 챗지피티 깔아 드려야겠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