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마 아프 클린트를 소환하며] 감각·세계의 '예외성'에 끊임없이 질문 던져야

입력 : 2025-10-23 15:59:42 수정 : 2025-10-23 16: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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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협함에 관하여
신비주의 맹목적 숭배는 위험
핵심은 회화 본질 향한 치열함

‘No. 9, 대형 형상화’. 그룹 III, WU/장미 연작, 1907, HaK 047.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제공 ‘No. 9, 대형 형상화’. 그룹 III, WU/장미 연작, 1907, HaK 047. 힐마 아프 클린트 재단 제공

그렇다면 힐마 아프 클린트는 왜(혹은 과연) 대단히 훌륭한 화가인가.

종종 우리는 회화의 규범적 기준이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말하며 그 기준을 해체하려는 시도에 동조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회화의 기준은 결코 단순히 억압적이거나 폐쇄적인 체계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기준은 수 세기에 걸친 시각적 훈련과 기술, 구성에 대한 숙고, 그리고 감각과 이념이 조율되는 통합적 지평에서 이뤄져 왔다. 말하자면 이는 하나의 훌륭함에 대한 축적이었고, 예술가의 자의식이 도달해야 할 공통의 조건이(었)다. 우리는 그 기준 덕분에 벨라스케스나 세잔 그리고 마티스와 폴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너무 단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지나치게 쉽게 해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어떤 이름도, 어떤 이미지도, 어떤 장치도, 맥락 없이 동시대라는 이름 아래 전시되고 수용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미술은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면역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의 신비주의는 과연 예술적 실천의 진정한 발현이었는가 아니면 조형적 미성숙을 은폐하는 고도의 전략이었는가. 형식과 구조의 완결을 피해 가는 곡선과 상징, 반복되는 수열과 기호적 패턴, 이들은 과연 감각을 다듬은 끝의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미완의 상태를 정당화하는 수사에 불과한가. 힐마 아프 클린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그림을 그렸지만, 그 보여주지 않음은 때때로 회화 정확성의 결핍을 감추는 안개처럼 작동한다.

그는 자신을 도구(영매)로 위치시키며 자율적 작가의 자리를 기피했고, 이는 (어떤) 제도에서의 전략적 회피였을 수 있지만 동시에 작업의 일관된 언어를 구축할 수 없었던 불쌍한 미술가의 변명일 수도 있다. 도상을 단독으로 성립시킬 수 없는 화면들과 반복의 기법에 숨어 버린 형식적 응답의 부재, 시대를 앞선 감각 때문일까 아니면 회화 내부의 문제에 충분히 도달하지 않은 감정과 신비의 외피로 포장된 시도였을까.

물론 우리는 예술가의 위대함을 언제나 그가 구축한 이론이나 형식의 완결성에서만 판단할 수 없다. 그런데도 회화라는 매체 안에서 어떤 형상이 성립되는가. 혹은 어떤 감각이 정확하게 전이되는가 하는 질문은 언제나 물어져야 한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분명 독특한 감각과 세계를 제시한 예외적 작가였다. 그러나 예외는 반드시 훌륭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신비주의는 회화의 본질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통로였는가 아니면 그 도달을 끝내 포기한 채 상징의 연극 속에 숨어버린 자의식의 위장이었는가. 그 질문 없이 힐마 아프 클린트를 숭배하는 일은 미술 자체를 망각하는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작가를 적절히 소환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소환은 다시 하나의 면역 체계에 불과한 반복이 될까. 바로 이런 질문들이 우리가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이다. -끝-

최상호·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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