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향토기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생존 메시지

입력 : 2025-10-23 16:53:22 수정 : 2025-10-23 16:5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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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고무벨트 방식-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회사 만들기'
"기존 '트리'형 조직은 위기취약…'리좀'형으로 전환을"

부산의 향토기업 동일고무벨트(DRB)가 창사 80주년을 맞아 발간했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사사(社史)는 결코 아니다. 회사의 8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단락이 잠시 나오지만 책의 골격은 미래를 위한 고민과 실험들로 얽혀 있다.

그 실험과 고민은 이 회사만의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중견기업들, 어쩌면 전세계의 모든 기업, 아니 인류가 함께 진지하게 곱씹어 봐야 할 어젠다다.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대전환을 맞고 있다.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나는 ‘후기 노동 경제’(post-labor economy)가 부상하고,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되며, 생명체가 여러 행성에서 살아가는 다행성 문명이 현실이 된다. 거대한 세 파도가 동시에 밀려올 때 인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기업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가 화두다.

저자에 따르면 “정부는 정권 교체에 따라 방향성이 바뀌기 쉽고, 시민 사회는 이해관계에 따라 분절돼 있으며, 국제기구는 추상적 합의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기업은 일관된 전략, 연속된 자원, 실시간 조정 능력을 바탕으로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은 고객의 생존 조건 자체를 공급하고, 문명의 생명 유지 장치를 ‘납품’하는 계약자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조직 구조의 변화도 제안한다. 산업혁명 이후의 기업은 안정성과 확실성을 전제로 설계된 트리(tree) 구조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가장 먼저 무너진다. 이럴 때 살아남는 것은 감각하고 반응하는 생명체 뿐이다.

DRB는 80년 된 제조 기업을 유기체처럼 자극에 즉시 반응하는 조직으로 바꾸고 있다. 철학 이론서에만 존재하던 리좀(rhizome·뿌리줄기) 개념을 현실 속 기업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 2022년 출범한 ‘퓨처랩스’(Future Labs)라는 사내 조직을 통해서다.

퓨처랩스에는 ‘팀장’ ‘리더’ 같은 명칭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온라인 동호회처럼 ‘운영진’이 파트타임으로 퓨처랩스를 맡는다. 구성원들은 자발적 참여로 실험과 실증을 반복·진화하면서 10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로봇 구동 설루션, 고무민들레 재배, 도심 실내 농업, 개인용 호흡 장비, 자율주행 지게차, 로봇 발 엔지니어링 등 다양한 아이템이다. 이 회사가 구현하려는 리좀적 사고와 네트워크형 구조는 기업을 넘어 사회와 국가의 운영 원리로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책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DRB’이다. DRB는 동일고무벨트와 그 계열사를 총괄하는 브랜드명이자 지주회사의 법인명이다. 한때 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은둔형 경영인으로 남은 창업주 후손의 손길이 책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우리 사회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이 책장과 책장 사이에 숨겨져 있다. DRB 지음/스리체어스/221쪽/2만 원.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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