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퇴행의 시대, 가장 강력한 의무에 대하여

입력 : 2025-10-23 18:02:43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프린트

논설위원

지구촌 곳곳서 인류사적 위기감 팽배
타협·협력 실종 힘 앞세운 폭력 만연
상호주의·탈식민 과거 치열함의 산물
공동체 병적인 가치관 암흑 시대 초래
야만·무지 불행한 역사 반복 막으려면
불행한 현재, 미래 세대 넘기면 안 돼

인류는 법과 관습, 규칙 등 다양한 규율에 근거해 삶을 이어간다. 규율은 지적 체계에 기반한 공동체 가치관을 통해 힘을 얻는다.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치관은 먼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류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지켜온 것들이다.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누리는 자유, 평화, 민주주의, 평등, 다양성, 인도주의, 인권 등은 치열한 노력으로 일궈낸 귀중한 유산인 셈이다. 공동체 가치관의 좋고 나쁨은 그 뿌리를 이루는 지적 체계의 질과 공고함에 비례한다. 지성이 빛을 잃고 무지와 야만에 굴복할 때, 즉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등 병적인 공동체 가치관으로 무장한 개인들이 장악한 집단과 국가가 힘을 얻을 때마다 세계대전 등 인류를 퇴행시키는 암흑의 시대가 어김없이 도래했다.


병든 공동체 가치관이 촉발한 퇴행적 사건들의 부작용은 너무도 치명적이다. 대규모 살육과 문명 기반 파괴 등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더욱이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규모 전쟁 등 인류사적 퇴행은 누적된 퇴행들의 종합적인 귀결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중한 정신적 유산들이 무너지고 반지성적 행태들이 난립하는 바로 그 순간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더욱이 지적 체계와 공동체 가치관 등의 유산은 보기보다 약하고 작은 충격에도 쉽게 바스러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미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 거대한 퇴행의 물결에 휩쓸려 그동안 이뤄온 소중한 유산을 모두 잃고 야만의 시대를 장기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가. 현재 지구촌이 무척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다는 경고가 도처에서 이어진다.

크고 작은 퇴행의 증거는 너무도 많다. 우선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을 들여다보자.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다시 선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기존 세계질서와 공동체 가치관을 스스럼없이 훼손하고 있다. 인류가 어렵게 구축한 상호주의를 무시하는 일방적 관세 부과, 각종 차별적 발언, 자발적 재산 공개 거부, 기후 위기 조롱 등 민주 사회에서 상상키 어려운 반지성적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남북전쟁 등을 통해 힘들게 구축한 공동체 가치관과도 상반된다. 트럼프 대통령을 거듭 지지한 과반수 미국 국민들은 더 많은 경제 이익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중국 등 후발 경쟁국에 대한 분노적 감정에 굴복한 것인가. 최소한 그들이 타협과 협력을 중시하는 진일보한 지적 공동체를 염원치 않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의 퇴행은 미국이라는 공동체 전반에 걸친 가치관 퇴행의 방증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상호주의에 기반한 ‘탈식민 세계화’라는 인류사적 흐름은 이미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힘에 의한 자국 이익 추구 경향이 노골화하면서 짧은 평화의 시기가 끝났다는 탄식이 이어진다. 영국은 이미 2020년 유럽연합에서 정식 탈퇴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3년째 참혹한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가자지구 갈등은 일상이 되었고, 중국은 대만 침공을 공공연한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과 중국, 이란, 러시아 등 이른바 반미축과 미국과 일본 등의 신냉전 갈등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핵무장 경쟁은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세계대전의 뼈아픈 교훈은 온데간데없다. 한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격한 토론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한국 정치권에서는 숙의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려운 조롱과 상대 악마화 등이 판치고 있다. 정치 실종이 일상화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집단과 개인 이기주의, 편가르기가 심화되는 등 공동체 가치관에 심각한 퇴행이 발생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인류의 불행한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지적이 거세다. 물론 인류 역사는 짧은 평화와 기나긴 암흑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무지와 야만이 판치는 퇴행이 초래한 참담한 과거와 불행한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류는 사회적 진화를 거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재를 사는 인류는 과거에서 전승한 정신적 유산들을 다듬고 발전시켜 미래로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삶이 세대에서 세대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 한 세대의 잘못된 선택이 미래 많은 세대의 삶까지 망칠 수 있다는 단순한 섭리부터 깨달아야 한다. 시간이 현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확산될 때 현재의 각종 퇴행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짧은 성장통에 그칠 수 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가치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은 물론 희망의 씨앗을 많이 뿌려 후인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욕망에 사로잡힌 불행한 현재를 미래 세대에 떠넘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모든 개인들에 부여된 가장 강력한 의무라는 것을 서둘러 자각하길 소망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금정산챌린지
wof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

실시간 핫뉴스

FUN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