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안전위원회가 23일 고리원전 2호기의 계속운전 허가에 대한 심의를 재개한다. 사진은 이날 부산 기장군의 한 마을에서 바라본 고리원전 2호기(오른쪽 두번째)와 영구 정지 8년 만인 지난 6월 해체가 결정된 고리원전 1호기(맨 오른쪽) 모습. 김종진 기자 kjj1761@
한국의 우라늄 농축과 고준위 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제한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한미 간의 논의가 급진전되고 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23일 “한국이 아주 강력하게 요청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면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이 곧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 협정은 핵확산 방지를 이유로 한국이 핵물질을 처리하려면 미국의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원전 26곳에서 배출되는 폐연료는 재활용되지 못한 채 쌓이고 있다. 원전 20기 이상을 운영하는 프랑스, 중국 등은 재처리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국은 ‘원전 강국’을 자부했지만, 핵물질 처리에 족쇄가 채워진 대목은 무참한 노릇이다.
한국은 원전 연료로 사용되는 저농축 우라늄을 전량 수입하고 있다. 우라늄 농축이 금지되어 있고, 폐연료를 재처리해서 연료로 재활용하는 길도 막혀 있는 탓이다. 이는 핵연료주기 기술 개발의 걸림돌이었다. 반면 일본은 1988년 미국의 동의를 얻어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한 결과, 45t 이상의 플루토늄을 분리했다. 따라서 이번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재처리 빗장이 해제되면 연료 확보와 재처리 부문에 있어 기술적,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작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에너지 자립과 재처리 이후 사용후핵연료 부피 저감, 신형 원자로 기술 개발 등 비경제적 가치와 장기적 전략에 미칠 영향도 크다. K원전의 전환점이라는 의미다.
글로벌 원전 경쟁력을 가진 한국이 ‘우라늄 주권’을 회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장차 환경과 기술력, 경제성뿐만 아니라 국제 외교까지 얽히고설킨 난제들이 수두룩하다. 폐연료 재처리 때 배출되는 고위험 방사성 물질은 환경 오염을 초래한다. 고도의 기술력과 위험 부담이 따르기 때문에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 업체에 재처리를 위탁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미국은 재처리하지 않고 처분을 선택했다. 또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과 NPT(핵확산금지조약) 준수 등 안보 우려를 해소할 책임도 막중하다.
핵무장 직전의 플루토늄을 확보한 일본은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들어서면서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 국방비를 늘리고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을 보인다. 북한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담을 앞두고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하며 도발을 계속한다. 동북아의 핵 안보는 비대칭적 위기 상태다. 이 대목에서 한국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컨대 부산과 경남에서 개발 중인 소형모듈원전(SMR)은 일반 원전보다 고농축 우라늄을 원료로 쓴다. 한국형 SMR에 적합한 원전 원료를 국산화하면 명실상부한 원전 선진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핵연료주기 역량 확보는 원전 수출에 있어 주요 신뢰 자산이 된다. 원자력협정 개정은 에너지 안보의 분수령이다. 지나친 낙관과 성급한 결론 대신 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