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작원관 300 용사

입력 : 2025-12-02 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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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음력 기준)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본격적인 전투 첫날인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된 데 이어 이튿날인 4월 15일 다대진성과 동래성마저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은 경남 양산 황산잔도를 거쳐 한양을 향해 거침없이 진격했다. 그런데 밀양시 삼랑진읍 작원관에 다다른 왜군은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에 직면한다.

밀양 작원관은 조선 시대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북 문경 조령관과 함께 2대 관문으로 불렸다. 작원관 일대의 길은 작원잔도로 불렸는데 왜군은 한양 진격을 위해 당시 가장 빠른 이 길을 선택했다. 작원관은 고려 시대부터 왜적의 침공을 방어하던 곳으로 고려 고종 때 지어졌다. 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다른 한쪽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있어 천혜의 요새로 불렸다. 평상시엔 영남대로와 나루를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했고, 유사시엔 군사요충지 기능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와 양산 함락 소식을 접한 박진 밀양 부사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작원관을 결사항전지로 선택했다. 4월 17일 시작된 작원관 전투로 300여 명의 군사와 백성들이 산화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왜군의 발을 3~4일 동안 묶었다. 이후 왜군은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는데 만약 ‘작원관 300 용사’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피란 여유가 더욱 줄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작원관 전투에 대한 고증 등 학계 연구는 여전히 미미하다. 〈선조실록〉 등도 간략한 기술에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한 이준영 작가가 ‘작원관 300 용사’를 주제로 〈임란, 삼백 감꽃〉(좋은땅)이라는 장편소설을 최근 선보였다. 전국시대 숱한 내전을 치르며 단련된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박진 부사와 군사, 백성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온몸을 던져 나라와 이웃과 가족을 구하려던 이들의 활약상을 상상 속에서라도 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작원관 용사들에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임란 때 소실된 작원관은 전쟁 뒤 복구됐지만 1902년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를 하면서 작원잔도가 파괴된 데 이어 1936년 낙동강 대홍수로 멸실됐다. 이후 1995년 원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원관 관문인 한남문 등을 복원했다. 작원잔도 일원은 현재 낙동강 자전거길과 산책로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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