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기억이 단절될 때 지역은 소멸한다

입력 : 2025-12-23 17: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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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농촌 인구 감소 속도 예상보다 빨라
대책 지지부진 빈집·휴경지 수두룩

마지막 주민 사라지면 역사도 잊혀
늦기 전에 채록 등 아카이빙 나서야

지자체 조례화·정부 적극 정책 통해
마을·주민 정체성 미래로 전승하길

요즘 농촌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마을에서 주민을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날이 찬 겨울철엔 더욱 그렇다. 외지로 떠난 젊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노인들만 농촌에 거주하다 보니 인구는 계속 줄어든다. 마을 노인들의 상당수도 외지 요양기관이나 병원으로 떠나가면서 ‘유령 마을’을 방불케 한다. 앞집도 빈집이고 옆집도 빈집이다. 대문에 체인 열쇠를 감아 밖에서 잠근 집이나 잡초만 무성한 휴경 농지가 부지기수다. 식당, 미장원 등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것은 인구 유출과 출산율 감소로 빠르게 소멸 중인 상당수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올 11월 기준으로 전국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소멸 위험에 처한 지역은 60.2%인 138곳에 달한다. 그중 소멸 고위험 지역은 66곳에 이른다. 경남에서도 전체 16개 시군 가운데 합천군, 산청군, 의령군, 창녕군 등 11곳이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이런 통계는 사실상 농촌의 대부분이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정부는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5극(초광역) 3특(특별자치도) 정책’으로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의 악순환을 끊겠다고 한다. 그러나 500대 기업 77%가 수도권에 있고, 지난해 신규 벤처 투자 68.5%도 수도권에 집중되는 등 수도권 일극주의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상황이다. 반면 소멸 위험 지역은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 추진되더라도 농촌 지역의 소멸 위험을 해소하려면 사실상 오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유럽 등의 상황을 보더라도 우리의 지역 소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영토의 사막화’ 또는 ‘변방화’를 극복하려면 긴 호흡의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결국 현재 우리는 정책적 단기 처방이 지역 소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있다.

여기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소멸 고위험 지역 내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읍면동부터, 그중에서도 외곽 마을부터 본격적인 소멸 물결에 휩쓸릴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처럼 도로 등 공공 인프라 관리 효율화를 위해 소멸 중인 마을들의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 집단 이주시켜 거주토록 하는 극단적인 방안이 머지않아 현실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지역이 최종적으로 소멸했다고 판단하는 기준과 절차는 무엇일까. 집계된 인구 통계와 이에 기초한 정부 심사와 고시 등일 것이다. 하지만 행정적인 절차에 앞서 해당 지역에 깃든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소중히 지켜온 것 등에 대한 전승이 끊어질 때, 즉 지역에 대한 기억이 단절될 때 해당 지역은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소멸 위험 지역의 역사와 문화, 스토리를 발굴해 기록하고 보전하는 작업은 무척 소중하고 큰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소멸 위험 지역 주민들은 고령화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입 인구가 없다 보니 노인들은 자신과 마을의 이야기를 후인들에게 전승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소멸 고위험 지역인 합천군 적중면이 ‘산안 열여섯 마을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적중면지’를 내놨다. 딱딱한 역사 기록을 나열하는 기존의 행정기관 백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출판물이라서 관심을 모은다. 주민과 출향인들이 편찬위원회를 결성해 적중면 16개 마을 노인들의 기억에 근거한 생활사 채록, 주민들이 보관하던 사진 자료, 마을의 변화 과정, 인물 데이터 베이스, 문화유산과 생활사 등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과 역사적 가치를 집약했다. 책정된 행정 예산과 별도로 자발적 모금을 통해 당초 계획보다 훨씬 방대한 664쪽 분량으로 2000권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책에 인쇄된 QR코드를 통해 드론 등으로 촬영한 다양한 동영상 자료까지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적중면지’는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라 적중면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한 기억을 미래로 전승하려는 주민들의 강한 의지를 담은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다. 적중의 과거를 현재와 연결하는 것은 물론 언젠가 이곳에 깃들 미래 세대들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출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지역을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을 지나고 있다. 절박함에 답할 대책은 지지부진한 반면 소멸 속도는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다. 주민 참여형으로 편찬된 ‘적중면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역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사라지기 전에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문화를 기록하고 보전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관련 조례 제정과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 추진이 시급하다. 마을에 깃든 이야기와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 전승시켜야만 지역이 잊히고 안타깝게 소멸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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