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년 9개월 만에 완전체로 돌아온 BTS 광화문 공연은 그 자체로 무성한 담론의 궤적을 남겼다. 누군가는 국가적 성과를, 누군가는 공공성의 훼손을, 또 다른 이는 문화산업의 파급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기서 정작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공연의 이름보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언어로 정의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광화문은 단순한 광장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갈등과 공공성이 교차해 온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BTS 역시 현재의 한국이 세계를 향해 호출하는 강력한 문화적 기호다. 이 둘의 결합은 오늘의 정치와 행정이 문화를 어떤 상징체계 속에서 다루고 있는지를 드러낸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무대를 둘러싼 낯선 군중들은 같은 리듬과 감각을 공유하는 거대한 공동체였다. 일상의 위계가 느슨해지고 자유와 평등의 공유된 감각이 분출되는, 이른바 ‘코뮤니타스’의 현장이었다. 뜨거운 일체감은 우리 대중문화가 도달한 절정을 상징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연적인 질문이 고개를 든다. “K팝이 BTS와 블랙핑크 두 팀에 제한되어 확산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의 지적은 뼈아프다. 지금의 성공이 실력이나 규모의 결과만이 아니라 “운 좋게 ‘케데헌’이 걸린 것”이라는 그의 냉정한 진단은 거대한 스펙터클 너머의 본질적인 물음을 남긴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1등’이라는 수식어에 집착한다. 문제는 최고만을 지향하는 문화는 다양성을 잠식하고, 결국 역동성마저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고는 우리네 공공극장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국의 수많은 공공극장은 지역 고유의 문화적 얼굴이라기보다, 어느새 수도권 대형 기획사나 언론사 주최의 흥행 위주 공연을 반복 유통하는 ‘쇼윈도’로 변모했다. 공연 행정이 극장을 예술적 가치를 위한 ‘생산지’가 아닌 선별과 편성의 ‘소비지’로만 이해하는 탓이다. 공공극장의 책무는 이미 완성된 남의 프로그램을 고르는 안일함을 넘어 지역만의 예술적 사유를 길러내는 데 있어야 한다.
도시 문화정책의 소명은 예술의 열망을 일회성 열광으로 휘발시키지 않고, 지속 가능한 ‘상상의 공동체’로 치환하여 축적하는 과정에 있다. 공연장이 백화점식 문화상품의 진열장으로 전락하는 순간, 공공극장은 미래를 생산하는 동력을 잃는다. 일각에서는 외부에서 쇼핑해 온 공연상품을 배치하는 ‘유통형 큐레이션’을 상수라 떠받들며, 자생적 무대를 일궈내려는 노력을 하수의 역량으로 폄훼한다. 그러나 매출과 효율만을 앞세운 행정이 운영 철학을 대신한다면, 결과는 빈곤해질 것이다. 검증된 이름들만 반복 호출하는 안일함은 시민의 취향을 박제하고, 감각의 확장을 마비시켜 ‘취향의 빈곤’을 초래한다. 화려한 ‘시즌’의 숫자 뒤에서 정작 우리만의 ‘내일’은 찾을 수 없다. 스스로 창작 동력을 포기한 무책임한 행정적 체념만 남을 뿐이다.
수도권에는 다양한 문화적 대체 경로가 존재하지만, 지역에서 공공극장은 문화예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결정적인 통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산의 공공극장들은 단순히 공연을 올리는 장소를 넘어 예술생태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공적 토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 문이 늘 같은 이름과 포맷에만 열릴 때, 지역은 예술을 생산하기보다 외부의 완성품을 소비하는 거대한 시장으로 고착된다. 이러한 취향의 획일화는 창의적 토양을 메마르게 해 결국 미래를 잠식한다. 오늘의 무대가 내일의 예술가를 기르지 못한다면, 도시는 문화를 소비만 하는 껍데기로 남을 뿐이다.
선거철이면 문화는 늘 ‘명품’, ‘고품격’, ‘세계적’이라는 수사로 손쉽게 소비된다. 정치가 진정으로 존중해야 할 목소리는 행사장의 박수가 아니라,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며 무대를 일구는 예술가들의 구체적이고 공적인 제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형적 화려함보다 운영의 철학이다. 찰나의 갈채만으로는 부족하다. 실패와 축적을 견딜 수 있는 ‘반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공공예술의 가치는 새로운 건물의 화려한 개관식보다, 지역 예술가와 시민이 그 안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으로 온전히 가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은 치적을 위한 수단도, 이해관계의 산물도 아닌, 미래세대를 위한 공공의 기반이어야 한다. 찰나의 열광이 교감의 순간인 ‘코뮤니타스’라면, 그 흥의 열기를 일상의 평온과 질서로 안착시키는 힘은 ‘예악’에 있다. 일찍이 허목이 〈악설〉에서 강조했듯이, 음악은 마음을 조화롭게 하여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는 근본이다. 소리가 화평을 이루듯 공공문화 역시 단순한 유흥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다듬는 공적 실천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더 큰 건물을 세우는 일보다 더 오래 맞닿을 수 있는 가치를 일구는 일이 우선이다. 부산 문화행정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핵심 가치도 ‘스타의 힘’ 이전에 ‘관계의 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