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텍스트 힙(Text Hip)’이 열풍이다. 글을 읽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멋이자 개성 표현으로 여기는 트렌드다. 이번 달 서울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입장권 예매를 위해 수만 명이 동시에 접속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여행 판도도 바뀌고 있다. 단순히 화려한 볼거리를 좇는 여행에서 벗어나, 도서관이나 서점 등 ‘책’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 사유의 시간을 갖는 여행이 떠오르는 것이다. 부산에도 이러한 트렌드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장소들이 있다. 기존의 딱딱한 도서관 이미지를 거부하는 감각적인 공간부터 나 홀로 온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북카페까지, 다가오는 여름 무더위를 피해 책과 함께 머물기 좋은 부산의 공간을 소개한다.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 자리한 국회부산도서관. 여러 종류의 책을 층층이 포개 놓은 켜를 본뜬 외관이 특이하다. 정대현 기자 jhyun@
■국회부산도서관- ‘오픈런’을 부르는 지식의 아지트
처음으로 발걸음을 옮길 곳은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국회부산도서관이다. 2022년 국회 최초의 지역 분관으로 개관한 이곳은 서부산 주민들에게 이미 사랑받는 아지트이지만, 다소 외곽에 위치한 탓에 이름만 들어본 시민들도 적지 않다.
지난 18일 국회부산도서관 앞에 생긴 대기 줄.김준현 기자 joon@
지난 18일 오전 8시 40분, 취재진이 마주한 도서관 외관은 인상적이었다. 층층이 쌓인 책의 형상을 딴 외관은 마치 건물이 “나야, 도서관”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놀라운 점은 입구 앞에 벌써 10명 남짓한 시민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서관’과 ‘대기 줄’이라는 다소 낯선 조합,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국회부산도서관 명당이라고 불리는 1인석.김준현 기자 joon@
국회부산도서관에는 이른바 ‘명당’이라 불리는 좌석이 있다. 주제 자료실과 의회 자료실에 위치한 1인석들이다. 특히 칸막이가 설치된 1인석은 완벽한 개인 공간을 제공해 이용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단 16석뿐인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부터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진다. 도서관 문이 열리는 순간, 시민들이 경보하듯 해당 좌석으로 향하는 모습은 이곳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국회부산도서관 1층 모습.김준현 기자 joon@
국회부산도서관 1층 모습.김준현 기자 joon@
국회부산도서관 1층 모습.김준현 기자 joon@
아쉽게 명당을 놓쳤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국회부산도서관의 진가는 높은 층고에서 오는 개방감에 있기 때문이다. 각 층의 층고는 4~5m를 넘는다. 심리적으로 층고가 높을수록 추상적 사고가 발달한다고 하니, 독서 공간으로서는 최적의 설계인 셈이다. 세련된 감각도 돋보인다. 단순히 책을 꽂아두는 용도에 그치지 않고, 한 책장에 한 권씩 배치하는 등 분야별 추천 책을 전시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더했다. 직원들이 디자인을 꼼꼼히 고려해 직접 고른 의자들 또한 공간의 미학을 완성한다.
국회부산도서관 1층에 위치한 미디어열람실 모습.김준현 기자 joon@
독서 외 체험도 다채롭다. 1층 미디어열람석에서는 다양한 영화와 DVD를 감상할 수 있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북 큐레이션 공간과 각종 문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특히 27일에는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진행하는 민주주의 특강이 예정되어 있어 기대를 모은다.
국회부산도서관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된다. 주말에는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매주 화요일과 법정 공휴일은 휴관이다.
■ 북두칠성도서관: 밤하늘 아래 책으로 길을 찾다
다음은 부산 동구에 위치한 북두칠성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밤하늘의 북두칠성이 길을 잃은 배에게 방향을 제시하듯, 시민들에게 지혜와 삶의 길을 안내한다는 취지로 2021년 개관했다.
북두칠성도서관의 둥근 책장.김준현 기자 joon@
북두칠성도서관의 가장 큰 특징은 압도적인 내부 디자인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둥근 책장이 공간을 에워싸고 있다. 도서관 곳곳에 마련된 독서 공간과 비밀스러운 토굴형 좌석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북두칠성도서관에 있는 토굴 같은 독서 공간.김준현 기자 joon@
북두칠성도서관 내부 모습.김준현 기자 joon@
별자리 모양을 모티브로 설계된 만큼, 도서 분류 방식도 독특하다. 일반적인 십진법 대신 문학, 예술·기술과학, 테마 서가, 언어·자연과학, 유아·아동, 철학·사회과학, 역사·여행 등 7개 분야로 나누어 방문객들이 더욱 직관적으로 책을 고를 수 있게 했다.
소소한 체험도 준비돼 있다. 서가 곳곳에 놓인 뜨개 바구니를 활용하면 누구나 뜨개질을 체험할 수 있다. 도심 속에서 잠시 손을 움직이며 사색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뜨개실과 바늘은 현장에서 최대 30분까지 이용 가능하다.
북두칠성도서관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도시철도 1호선 부산역에서는 도보로 약 13분 거리다. 자가용 이용객은 도서관 건물 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운영 시간은 평일 기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며, 매주 화요일과 법정 공휴일은 휴관이다.
■ 남천 열람실 & 서재온기: 나만을 위한 고요한 서사
특별한 공간에서 책을 읽는 낭만을 만끽하고 싶다면 소규모 인원만 입장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북카페를 주목해보자. 부산에는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이색 북카페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황홀한 오션뷰를 자랑하는 ‘남천 열람실’과 따뜻한 주택 감성을 오롯이 간직한 ‘서재온기’는 독서 마니아들이 애정하는 공간이다.
남천 열람실 모습.김준현 기자 joon@
남천 열람실 모습.김준현 기자 joon@
부산 남천항의 정취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남천 열람실’은 단 11개의 좌석으로만 운영되는 고요한 공간이다.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바다와 광안대교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원목 가구와 싱그러운 식물로 포인트를 준 내부는 평온함을 자아내며, 독서에 집중하기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곳은 예약제 운영을 통해 일행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장한다. 이용 시에는 정갈한 음료와 다과가 함께 제공된다. 각 좌석에는 외부 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 헤드셋이 마련되어 있어, 온전히 활자 속에 침잠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공유 일기장.김준현 기자 joon@
특히 이곳의 백미는 좌석마다 놓인 ‘공유 일기장’이다. 앞서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솔직한 넋두리와 일상의 파편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낯선 타인과도 깊은 정서적 유대를 느끼게 된다. 고전 문학부터 최신 서적까지 폭넓은 도서가 비치되어 있으나,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직접 챙겨와 나만의 도서관처럼 활용하기에도 좋다. 네이버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며 화·수요일은 휴무다.
서재온기 내부 모습.김준현 기자 joon@
서재온기 내부 모습.김준현 기자 joon@
서재온기 내부 모습.김준현 기자 joon@
남천 열람실이 세련된 감각을 지향한다면, 부산 동래구에 위치한 ‘서재온기’는 아늑한 비밀 아지트 같은 매력을 선사한다. 오래된 주택의 2층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독서가들에게 이미 입소문 난 ‘북카페 맛집’이다. 낡은 주택의 뼈대를 그대로 살린 인테리어는 방문객에게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깊은 안도감을 준다.
서재온기의 책 모양 전등.김준현 기자 joon@
서재온기의 책 모양 전등.김준현 기자 joon@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서재, 다락방 등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4가지 콘셉트의 방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공간마다 배치된 책 모양의 전등은 이곳이 얼마나 책이라는 소재에 진심인지를 잘 보여준다. 각 공간은 철저히 독립된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나와 책만이 존재하는 밀도 높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시가 선정한 독서 문화 공간 ‘B-북스팟’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서재온기는 무인으로 운영되며 오직 예약제로만 이용이 가능하다. 도심 속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만의 속도로 독서를 즐기고 싶다면, 오늘 오후 예약 창을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당신은 비로소 ‘텍스트 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