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올해 학위 없이 실무 역량을 갖춘 사람도 의사와 법정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병원·법률사무소에 취업한 뒤 교육을 받고 현장 실무를 익히면 의사나 변호사가 될 수 있게 했다. 2024년 국가기술역량 전담기구 ‘스킬스 잉글랜드’가 생긴 후 나타난 변화 중 하나다. 고학력 전문직 일자리도 학벌 중심에서 역량 중심으로 채용 시장이 바뀌는 셈이다.
아시아 내 글로벌 기업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싱가포르의 변화는 더 전방위적이다. 싱가포르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싱가포르 기업 80% 가까이가 채용 시 학력을 주요 기준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이 수치는 2023년 74.9%, 2024년 78.8%로 점점 높아졌다.
선진국이나 글로벌 기업이 학벌보다 실력을 더 중시하게 된 흐름은 기술 발달, 특히 인공지능(AI) 확산에서 비롯됐다. 기술 발달로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이 바뀌며 전통 채용 방식으론 필요 인재를 찾는 게 어려워졌다. 기존 교육 시스템도 새 유형의 인재 공급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과거 팀이 맡던 일을 한 명이 처리할 정도로 인력 수요도 급감하고 있다. 변해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우리 사회도 그 흐름을 따르는 분위기다.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가 신입사원 채용에 학력 기준을 폐지했다는 소식이다. 4년제 학사 학위 이상이라는 자격 요건을 없애고 직무 역량과 성장 가능성을 보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설계와 연구개발 등 핵심 직무에 고졸 지원자도 도전할 수 있다. 오랜 학벌 중시 관행이 깨지고 새 기준이 들어서는 하나의 신호탄으로도 읽힌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한꺼번에 바뀌진 않을 것 같다. SK하이닉스를 향해 “실제론 고학력자만 뽑을 것”이라는 냉소도 나온다. 잊힌 사실이지만 삼성전자가 학력 제한을 폐지한 건 30년이 넘었지만 그 파격적 시도가 사회 전체로 확산됐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대다수 기업·기관에선 여전히 관행을 깨려는 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고, 일부 대기업에선 가족 채용 요구가 나오는 등 황당한 ‘역주행’ 사례도 적지 않다.
학력 철폐로 도전 기회가 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섣부르다. 사회는 학력·스펙을 넘어선 인재를 요구하지만 구직자는 다른 대안이 없어 스펙 쌓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첫걸음도 떼지 못한 대다수 구직자들이 실무와 적응력, 경험까지 갖추라는 요구까지 받고 서러움만 더할까, 걱정이 앞선다. 김영한 논설위원 kim01@
김영한 논설위원 kim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