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내 마음은 호수’라는 표현으로 은유법을 배웠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마음을 호수에 비유하는 법을 배우고, 직유와의 차이를 익히며 은유가 그저 언어의 수사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문득 내 마음이 호수라면 누군가는 노를 저어 내게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과서에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자,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은유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늘 은유를 쓰며 산다. 어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생각하며 아침에 일어나 ‘마음이 무겁다’거나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마음에는 무게가 없고, 시간은 물처럼 흐를 수 없다. 그 느낌을 달리 전할 길이 없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유를 선택한다. 은유는 단지 언어의 장식이 아니라,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으려는 인간의 오래된 길이자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오래된 길의 어원을 찾아가면 그리스어 ‘메타포라(metaphora)’, 즉 ‘옮김’이나 ‘전이’라는 뜻과 만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은유를 뛰어난 언어 기법으로 보았지만,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유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라고 보았다. 그는 어떤 개념으로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은유’가 인간 사유의 깊은 층에 자리한다고 설명했다. 개념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은유는 먼저 길을 낸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마크 존슨과의 공저 〈삶으로서의 은유〉에서 인간의 개념 체계가 근본적으로 은유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폴리티컬 마인드〉에서 특정 은유를 반복해 접하면 그것이 신경 경로를 활성화해 강력한 ‘프레임’으로 자리 잡는다고 주장한다. 언어로 프레임을 선점하는 정치가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듯, 우리가 어떤 언어 환경에 노출되느냐는 사고방식의 형성에도 깊이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토론은 전쟁이다’라는 은유 안에 사는 사람은 상대를 이기고 무너뜨리려 하지만, ‘토론은 춤이다’라는 은유를 선택하면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며 어우러진다.
이러한 은유의 힘은 개인의 사고를 바꾼 뒤, 필연적으로 집단의 인식과 사회 정책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는다. ‘범죄는 맹수다’라는 은유가 자리 잡은 사회는 색출과 검거를 최우선으로 삼고, ‘범죄는 바이러스다’라는 은유가 자리 잡은 사회는 빈곤 등 근본 원인 제거와 예방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은유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결국 어떤 은유를 받아들이느냐는, 어떤 세계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변화를 한 개인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작품이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일 포스티노〉다. 직접적인 언어에 머물렀던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은유를 배우며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은유를 배우기 전과 후, 섬도 바다도 짝사랑하는 여인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들을 엮어 의미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은유를 얻기 전의 마리오는 세계에 압도되었고, 은유를 얻은 후의 마리오는 세계와 대화했다. 세계에 압도되는 삶과 세계와 대화하는 삶, 그 차이를 블루멘베르크는 은유가 만든다고 했다.
어떤 은유 안에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하면, 그 은유가 우리의 사고를 조용히 이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 속에서 여유로운 오후는 낭비가 되고, ‘인생은 전쟁터다’라는 말 속에서 일상은 생존의 싸움이 된다. 이 은유들이 공기처럼 퍼질 때, 우리는 그것을 선택했다기보다 어느새 그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쉬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타인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받아들인다. 은유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우리는 은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