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 서류를 전자화해 재판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며 도입된 ‘형사전자소송’이 시행 10개월이 지났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는 변호인 측이 필요한 수사기록을 확인하려면 여전히 검찰청을 직접 찾아가 복사하는 등 제도 도입 이전과 크게 달라진게 없다고 평가한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10월 형사전자소송을 시행했다. 서울중앙지법·서울동부지법·서울가정법원의 일부 사건을 대상으로 시스템을 운영한 뒤, 같은 해 12월부터 전국 법원으로 확대했다.
형사전자소송은 법원에 제출·송부되는 형사재판 서류를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제도로, 판사·검사·변호인이 기록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확인하게 만들자는 취지다. 도입 당시 법조계는 ‘종이 재판 시대’가 막을 내릴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시행 이후 약 10개월이 지났으나 부산 등 법조계에서는 형사전자소송이 현장에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법원과 검찰 사이의 서류 유통은 전자화가 원칙이지만, 기존 종이 수사기록과 법령상 예외 자료 등은 여전히 전자화되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이다.
변호인이 기록을 확인하는 절차도 예전 그대로다. 검찰이 보관 중인 수사기록을 열람·등사하려면 담당 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 수속에만 통상 며칠이 소요된다. 허가가 나온 뒤에도 변호사나 사무실 직원이 검찰청을 직접 찾아가 피고인·피해자의 주소나 연락처 등 개인정보를 비실명화한 뒤 복사해야 한다.
법원 기록도 마찬가지다. 변호인이 사건 기록을 요청하면 재판부가 기록을 열람복사실로 인계한 뒤 신청인에게 방문 일시를 통지한다. 부산지법은 홈페이지를 통해 재판 중인 형사사건 기록의 경우 재판장 허가와 기록 준비 때문에 원칙적으로 당일 열람·복사가 어렵다고 안내하고 있다. 통상 재판장이 사건 관계인의 개인정보 공개 여부와 열람·복사 방법을 결정해야 하는 구조여서, 2~3일은 지나야 기록을 받아볼 수 있다.
부산의 한 변호사는 “형사전자소송이 도입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변호인은 필요한 수사 기록을 받으러 직접 검찰청에 가서 복사해 와야 했다”며 “결국 변호인 입장에서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민사전자소송’은 이미 정착됐다. 민사전자소송은 2011년 전국 법원에서 시행됐으며, 현재 전자소송포털을 통해 소장·답변서·준비서면·증거자료 제출과 상대방 서류 열람, 전자송달 등을 온라인으로 처리한다. 법원 방문과 종이서류의 작성·복사·보관 부담을 줄이고, 서류 제출·송달과 기록 열람을 신속하게 해 소송 기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민사소송은 전자소송시스템에 로그인하면 원고와 피고가 제출한 서류와 증거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며 “민사에서 종이 출력은 선택에 가깝지만, 형사 재판에서는 기록을 확인하려면 복사해 오는 일이 아직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수사 기록을 법원에 송치하는 시점이 아니라 수사자료가 처음 만들어지는 단계부터 전자화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사기관이 작성하는 조서와 수사보고서, 확보한 영상·사진·전자정보 등을 표준화된 형식으로 저장하고 개인정보와 사건 내용을 구분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가 지난 7월 31일 처리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는 수사 과정에서 생산·확보한 자료를 형사사법정보시스템인 ‘킥스(KICS)’에 기록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다만 법률상 기록 의무와 실제 전자기록 활용은 별개의 문제다. 어떤 자료를 언제 입력할지, 기관 간 시스템을 어떻게 연계할지, 개인정보를 어떻게 비실명화할지에 대한 세부 기준과 시스템 구축이 뒤따라야 한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수사기록을 법원에 넘기는 단계에서 전자화할 것이 아니라, 수사자료가 처음 작성되는 단계부터 전자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며 “개인정보와 사건 내용을 분리해 관리하고, 권한이 있는 사람이 필요한 기록을 신속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현 기자 kks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