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모교에서 진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수시 원서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3학년부터 입시가 먼일이라 여기는 1, 2학년까지가 대상이었다. 학생들 궁금증은 주로 어느 학과를 선택해야 하는지에 몰려 있었다. 한참 전에 입시를 치른 나로서는 지금의 교육 과정과 대학 입시 전형에 맞는 요령을 일러 줄 수 없었다.
“저는 영어를 좋아하는데, 수학 성적이 좋아요. 취업을 잘하려면 어느 과에 가야 할까요?”
그날 한 학생이 건넨 질문이다. 대학 입시에서는 흥미나 적성보다 성적이 기준이 되곤 한다는 것을 알기에, 당장 시원한 답을 주기는 어려웠다. 나는 유망한 학과에 관한 이야기 대신, 그동안 대학과 사회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치열하게 고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유망학과 가면 진로 열린다는 건 오산
공부와 일, 막연한 생각과 다를 때 많아
전환기마다 다시 묻는 탐색 시간 필요
다음 건너는 데 필요한 건 유연한 태도
이미 바뀐 일의 세계, 부딪혀 알아내야
시행착오 쌓이면 '나의 길'도 선명해져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인기 학과는 전자, 화학, 기계공학, 이른바 ‘전화기’와 생명공학 계열이었다. 나도 과학기술원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했다. 그때의 나 역시 원하는 학과에 진학만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올 줄 알았다. 하지만 연구실 인턴십을 하며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대학 공부가 다르고, 그 공부와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또한 다르다는 것을. 결국 고민 끝에 산업디자인학과로 전과했다.
이런 방향 전환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이제는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 가는 일이 되었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의 린다 그래튼 교수는 배우고, 일하고, 은퇴하는 세 단계의 삶이 저물고 있다고 말한다. 수명이 길어진 시대의 삶은 여러 단계로 나뉘고, 그 사이마다 크고 작은 전환기(Transition)가 찾아온다. 대학에 들어갈 때, 첫 직장을 구할 때뿐 아니라 사회에 나가 일을 할 때에도 일을 마친 뒤에도. 무엇을 하며 살지 묻고 시도해 보는 탐색의 시간은 이제 20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올해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청년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졸업 후 첫 직장의 평균 근속기간은 1년 6.8개월이었다. 여러 사정이 겹친 숫자겠지만, 첫 선택이 곧바로 답이 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대학에서 내가 처음 디자인한 제품은 음식을 포장하는 종이 패키지였다. 이후에는 전자 제품과 포스터로 옮겨갔고, 서비스디자인도 하게 되었다. 취직한 뒤에는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을 디자인했다. 디자인 분야가 바뀔 때마다 새 도구를 익혀야 했지만, 매번 처음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어디서 불편을 겪는지 들여다보고 그것을 디자인으로 풀어 가는 일, 그 본질과 통찰력은 어느 환경에서나 같았다. 그래서 분야가 바뀌어도 다음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전환기에 필요한 자세는 변화를 막아서는 힘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들고 갈지 고르는 유연한 태도였다.
일의 세계는 이미 바뀌었다. 하지만 진로 특강 날, 학생들이 펼쳐 보던 학과 안내서에는 내가 지금 하는 일과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은 없었다. 학교 밖에는 아직 이름조차 붙지 않은 일들이 무수한데, 진로를 바라보는 관점은 얼마나 변했는가? 우리가 아는 좋은 직업의 이름은 여전히 몇 개에 머물러 있고, 여전히 학교 앞 교문에는 대학 합격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한다.
업무 환경도 달라졌다. 주 5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는 틀을 벗어난 것도 드물지 않다. 지금 나는 외국계 회사에서 재택으로 일한다. 해외 업무 시간에 맞춰 밤에 화상 회의에 들어가기도 한다. 바뀐 것은 시간과 장소만이 아니다. AI는 업무의 도구와 역할까지 바꾸고 있다. 어떤 일을 맡게 될지는 달라져도, 변화에 맞춰 배우고 문제를 발견해 풀어 가는 힘은 계속 중요해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학과에 갈지, 어떤 직종에 도전할지는 책상 앞에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혀야 알 수 있다. 웬만한 질문에는 척척 답하는 AI도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이 움직이는지, 어떤 문제를 풀고 싶은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여전히 학교 안에서 시행착오는 되도록 피해야 할 것이 된다. 원서 한 장, 시험 하루에 많은 것이 걸려 있으니, 아이도 부모도 돌아가는 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제 사회에서 시행착오는 길을 찾는 방법 그 자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피하는 일이 아니라 발판 삼아 내 길을 선명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날 질문을 건넨 학생에게 결국 유망 학과를 일러 주지는 못했다. 다만 지금의 선택은 첫 번째 선택일 뿐, 마지막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다. 수능이 끝나면 학생들은 삶의 첫 번째 전환기를 맞는다. 그 문턱에서 정답 같은 학과 하나를 고르는 일보다 앞으로 몇 번이고 다시 찾아올 전환기를 어떤 태도로 건너갈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날 특강에 모였던 학생들에게도. 그리고 이미 몇 번의 전환기를 지나온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