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4류'

입력 : 2026-10-28 17: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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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 편집부 차장

유력 정치인의 ‘과잉 의전’ 논란
제왕적 권위주의 특권 의식 문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국가 경쟁력 발목 잡는 리스크

20년도 더 됐나 싶다.

당시 사회부 경찰 기자였던 나는 “지금 당장 모 음식점으로 가라”는 기자 선배의 지시를 받았다. 폭력배들의 난동이 있었으니 피해 상황을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차분했던 선배였지만, 그날은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식당 사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나의 계속된 질문에 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전날 국내 정상급 가수의 콘서트 뒤풀이가 그곳에서 열렸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즈음, 건장한 남성들이 몰려와 테이블을 엎고 고함을 지르며 위협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무리가 도착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남성들이 늘어섰고, 물리적 충돌도 발생했다.

추가 취재와 경찰 수사로 사건의 경위가 드러났다. 소동을 주도한 이는 유명 가수의 공연을 진행했던 기획사 관계자였다. 그는 콘서트 객석에 유력 정치인을 초청한 뒤, 가수에게 공연 도중 그를 청중에게 소개하라고 요구했다. 가수가 이를 거절하자 폭력배를 동원해 위협을 가했다. 당시 그 정치인은 유력한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정치인 한 사람의 의전을 챙기려다 지역 폭력 조직 간의 세력 다툼으로 번진 사건이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세월이 흘렀다. 20년 전 사건을 다시 꺼낸 이유는 최근 불거진 한 정당 대표의 ‘과잉 의전 논란’과 본질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역 축제에서 가수의 축하 공연 도중 무대에 올랐다. 가수가 노래를 마치고 다음 곡을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사회자가 개입해 특정 팬이 왔다며 마이크를 넘겼다. 대형 스크린에는 정치인의 이름과 사진이 띄워져 있어서, 사전에 기획된 순서라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주말 축제를 즐기러 온 대중의 문화 향유권이 정치인의 인사말에 자리를 내어준 셈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정당 대표의 갑질 아니냐?” “공연의 맥을 끊어놨다” “민주당 개최 행사인 줄 알았다” 등의 비판이 정치권과 인터넷을 통해 쏟아졌다.

과잉 의전을 기획한 실무자만 탓할 일이 아니다. 본질은 살아있는 권력의 태도에 있다. 대우받기를 바라고 특권을 당연시하는 권력자들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논란 이후에 내놓은 해명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사회자가 호명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대처 방식은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무대 아래서 “공연에 방해된다. 관객이나 가수에게 피해를 준다”라며 정중히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예기치 않게 마이크를 잡았더라도 양해를 구하고 짧게 물러나는 것이 상식으로 보인다.

특권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순직 소방관 조문 길에 병원 응급환자 전용 구역에 주차했다. 또 오전 5시에는 교대와 휴식이 필요한 소방관들을 모아 놓고 사진을 찍어 논란이 됐다. 위급한 환자의 공간도, 휴식이 필요한 소방관의 시간도 정치적 행보를 위한 배경이 됐다. 과거 민주화에 앞장섰던 정치인이 기성 권력의 권위주의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아 아쉽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특정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권에서 과잉 의전은 진영을 가리지 않는 오랜 병폐다. 과거 한 보수정당 대표는 관용차를 타고 KTX 플랫폼 내부까지 진입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또 다른 정당 대표는 수해 현장에서 관계자들의 과도한 신체 부축을 받아 ‘인간 받침대’ 논란을 빚었다.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권 기저에 권위주의가 짙게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결국 정치권에 뿌리내린 ‘제왕적’ 권위주의가 실무자들로 하여금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고 무리한 의전을 기획하게 만든 주범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30여 년 전 한 말이 떠오른다. 당시 대한민국 사회를 평가하며 남긴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뼈아픈 일갈. 4류 정치라는 꼬리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 권위주의와 특권에 취해 있다 보니, 정작 민생 현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권력 다툼과 정파적 이익에만 사활을 걸고 낡은 관성에 갇혀 소모적 정쟁에 몰두하는 정치권. 그 사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민생 법안은 수북이 쌓여 있다. 오히려 한국 정치는 국가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리스크로 전락했다.

권력의 진정한 무게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았을 때가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 묵묵히 박수를 치며 주변을 돌아볼 때 증명된다.

김형 기자 mo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