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자주 애용해 오던 넋두리가 있다. ‘거 참, 어찌 이리 쉬운지, 잘 살지 못하는 삶은…’ 요런 식인데, 웬만한 쓸쓸함에 모두 접목 가능하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내 노력의 부족함을 희석하기 위해서도 사용 가능하고, 쉽게 살다 보니 잘 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당위의 뜻을 세울 때도 가능하다. 넋두리 대상이 타인일 경우 거리감에 따라 지시대명사만 ‘이’에서 ‘그, 저’로 바꾸면 무난히 사용할 수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런 넋두리가 나올 때는 어떤 쓸쓸함이 딸려 오기 마련이다. 생활의 지난함이 이상을 짓누르거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마찰의 찌꺼기가 쌓여갈 때. 생각이 점점 무거워져 마침내 쓸쓸함으로 피어나서 마음에 쌓일 때. 그럴 때면 체면 차릴 사이도 없이 후루룩 넋두리가 흘러나온다. 그동안 갈고 닦은 넋두리 하나쯤 날려 주면 잠깐 숨은 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다. 마음 속에 쌓인 쓸쓸함을 툭툭 털어 내고 또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나는 잠수를 한다. 프리나 스쿠브 같은 거창한 이름이 붙는 잠수는 아니고, 그저 잠깐 물속에 들어가 있는다. 날이 춥지 않으면 가끔 가는 해변으로 가서, 파도가 잔잔한지, 물이 너무 차지 않은지 확인하고, 귀마개를 꽂고 물안경을 쓴다. 물 온도에 몸이 적응하도록 잠깐 물 안에 서 있다가 눈에 익은 갯바위 근처까지 천천히 헤엄쳐 간다. 도착하면 수평선을 바라보며 호흡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린다. 잔잔해지면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90도로 고개 숙여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3미터쯤, 깊어 봐야 5미터가 안 되는 곳까지 내려가 붙잡기 좋은 돌을 하나 끌어안는다. 끌어안고는 가만 있는다. 적당히 들기 좋은 돌이 보이면 배 위에 올려두고 수면을 향해 눕는다. 누워서 가만 있는다. 이 과정은 10초 안에 이루어진다. 내 물숨은 40초와 1분 사이가 한계여서, 올라오는 시간을 5초 정도 할애해야 해서, 내가 물속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30초 내외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물속에 자리 잡고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센다. 만류 인력과 부력 사이에서 숨을 멈추고 빈틈없이 몸을 감싸는 물의 밀도를 받아들인다. 일곱과 여덟이 지나가면 몸이 슥 가벼워지고 물속 리듬 따라 눈이 밝아진다. 밝아진 눈으로 물속을 들여다본다. 열하나 열둘 사이로 해초에 내려앉은 물컹한 햇빛의 무게가 열리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군소의 몸피 따라 일렁이는 물속 파도가 흐른다. 열다섯 열여섯 위로 뒤집힌 돌무지 따라 먹이 찾는 용치놀래기들이 모여들고, 열아홉과 스물 사이 바위굴 속 토끼 눈을 한 문어와 눈이 마주친다. 스물셋 스물넷에 맵싸리고동 뿔소라 성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고, 스물아홉과 서른 사이에 잡았던 돌을 놓고 물 위로 올라온다. 운이 좋아 숭어떼를 만나는 날에는, 우와… 라고 외치다가 물숨이 새어나가는 것도 잊을 만큼 황홀하다. 그 황홀한 반짝임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상징 가치인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물속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면, 돌아가야할 수면 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쓸쓸함 따위는, 오래전에 지구를 호령했다는 공룡의 후예가 지금은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의 치킨이 되었다는 사실처럼, 자잘한 사실이 된다. 자잘한 쓸쓸함으로 변한다.
지구별을 같이 살아가는 수많은 동지들도 그 자잘함을 발견하면 좋겠다. 지구의 자전 속도에 내 마음을 맞추기가 버거울 때는, 멋들어진 넋두리 하나쯤 지구 자전의 반대 방향으로 발사하자. 그래도 감당하기 힘든 쓸쓸함이 밀려오면, 슥 자신만의 잠수를 기획하시기를, 자잘한 사실들을 발견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