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정국에서 조용한 대행자의 꼬리표를 떼고 직접 ‘선수’가 되기로 한 모양이다. 당초 기대와 달리 탄핵심판 절차의 중요한 길목마다 어깃장을 놓으면서 ‘여당의 트로이 목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대행은 결원인 헌법재판관 임명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숱한 견해에도 26일 결국 ‘임명 보류’를 밝혔다. 헌재는 물론 야당, 대법원 심지어 여당 대변인까지도 국회 추천 재판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고집불통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지 벌써 2주가 지나고 있지만 헌재 재판관 임명부터 내란 혐의 관련 상설·일반 특검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다. 온 나라가 거의 결딴난 상황이 해를 넘길 시점인데도 탄핵 정국은 더 앞을 헤아리기 힘들다. 비상계엄에 놀란 가슴을 아직도 진정하지 못하는 국민은 지지부진한 뒷수습에 화병마저 날 지경이다.
최근 정국 흐름이 이렇게 꽉 막힌 것은 한 대행의 책임이 가장 크다. 평소 합리적인 성품으로 알려졌던 한 대행의 예상치 못한 변신 때문인데, 한 대행은 어떤 이유인지 중립적인 입장을 버리고 앞으로 완전히 윤 대통령을 비호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 같다. 국민들은 헌법상 형식적인 절차인데도 헌재 재판관 임명을 여야 이견을 내세워 회피한 밑바닥엔 어떤 저의가 있을지 모른다고 크게 의심한다. 따져 보면 전혀 근거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한 대행의 몽니는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하나의 목적이 보인다. 바로 윤 대통령의 탄핵 절차 지연이다. 결원 재판관을 충원해 탄핵심판이 절차적 정당성 속에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게 온 국민의 바람이지만 한 대행은 들끓는 비난에도 대놓고 이를 거부했다.
이를 두고 항간에 온갖 얘기가 떠돈다. 우선 한 대행이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과 달리 매우 깊숙이 관련됐을 수 있다는 의심이다. 대통령으로부터 사전에 계엄을 통보받았거나 아니면 계엄에 관한 포괄적인 지시를 받았다는 말도 나온다. 심지어 다음 대권 주자로서 모종의 암시까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중요한 시국의 갈림길에서 내란죄 피의자인 윤 대통령과 그에게 맹목적인 여권 친윤계에 바짝 붙으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 대행과 관련된 온갖 미확인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대행의 처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국민의 정서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공직 생활에서 몸에 밴 신중함의 산물이라고 하기에는 한 대행의 처신이 너무나 정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탄핵안 가결 이후엔 “현 상황의 조속한 수습과 안정된 국정 운영이 제 긴 공직 생활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했지만 이제 와서 보면 이는 윤 대통령의 “법적·정치적 책임 문제를 회피하지 않겠다”라는 새빨간 거짓말과 동격의 뻔뻔함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온다. 한 대행의 돌변은 현 정국을 안정시키기는커녕 혼란만 더 부추긴다.
‘늘공’의 끝판왕인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왔는데도 한 대행이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지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퇴행적인 돌변은 두고두고 역사와 국민의 냉혹한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당장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한 대행의 탄핵을 결의했다. 국정이 어디로 향할지 또 한차례 폭풍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뻔히 예고됐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부추긴 것 자체가 국민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내란 상설·일반 특검 역시 마찬가지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상설 특검안과 관련해 특별검사 후보추천위원 중 정당추천 위원 4명의 명단을 대통령실로 벌써 발송했지만 10여 일이 넘게 뭉개고 있다. 12일 국회에서 의결된 내란 일반 특검법도 법 공포 대신 여야에 타협안 마련을 요청했다. 공포도 아니고 거부권 행사도 아니다. 지금 정국에서 여야 합의가 될 리가 없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데도 버젓이 여야 합의를 내세웠다. 한마디로 책임을 국회로 떠넘기면서 시간을 벌자는 의도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정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는 심증은 이렇게 해서 국민들 마음에 더욱 굳어진다.
헌재 재판관 임명 보류와 상설·일반 특검 관련 절차의 의도적인 지연으로 한 대행의 속마음은 ‘조속하고 안정된 국정 수습’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야당은 한 대행에 대해 즉각 탄핵소추안 발의를 선언했다. 유례가 없는 권한대행 탄핵안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예단할 수 없지만 한 대행은 스스로 안정된 정국 수습의 걸림돌이자 짐이 되기를 자초한 꼴이 됐다. 한 대행은 끝내 55년 공직 생활의 마무리를 국민보다 ‘윤석열의 길’을 따르기로 작정한 것인가.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