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5일 새벽. 스마트폰에 설치한 외신 어플들이 일제히 푸시알람을 보냈습니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4세기에 완공된 세계적인 유산이 불타는 광경에 깜짝 놀라 잠이 싹 달아났습니다. 황급히 노트북을 켜고 속보를 처리한 뒤 경과를 지켜보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올해 6월 29일 개봉한 ‘노트르담 온 파이어’는 4년 전 발생한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사건을 다룬 재난 영화입니다. 860년이나 된 건물에서 난 화재를 진압하느라 사력을 다한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영화는 화재 당일 일어난 일들을 시간 순으로 배치하는 단순한 구조로 흘러갑니다. 몇 시간짜리 교육만 받은 통제실 담당자, 대성당 공사현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몰지각한 인부가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결국 인부가 버린 담배꽁초가 불씨가 돼 불이 번지기 시작합니다. 실제 노트르담 성당 화재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담배꽁초가 원인일 수 있다는 의혹은 사건 초기부터 제기됐습니다. 당시 현지 경찰은 화재 현장에서 담배꽁초 7개를 발견했고, 성당 보수작업을 맡았던 업체도 현장 근로자들이 흡연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영화는 전형적인 재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연출 기법을 답습했습니다. 발화지점에선 연기가 피어오르지만 성당 내부는 잠잠합니다. 통제실의 화재경보기에 뜬 경고에 따라 보안 직원이 찾아가본 ‘성물실 다락’은 멀쩡합니다. 보안 직원은 “경보 시스템이 몇 년째 말썽이라 상부에 보고를 몇 차례나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래도 화재경보가 떴으니 성당엔 대피방송이 흘러나오고, 미사를 보던 교직자들은 성가시다며 투덜댑니다. 같은 시각 성당 상부층에선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불이 날 리가 없다’며 반신반의합니다. 결국 ‘본당 다락’이 발화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성당 측은 부랴부랴 소방에 신고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이제 공은 파리 소방대에게 넘어갑니다. 고층인 대성당 상부에서 발생한 불을 끄는 것도 문제지만, 가시면류관을 비롯해 역사가 깃든 보물들을 안전하게 구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실제 화재 당시 곳곳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삽입돼 현장감이 있습니다. 영화는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심어뒀습니다. 보수 작업 때문에 설치해둔 500톤에 달하는 비계 구조물이 녹아내리면 성당이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종탑이 화염에 휩싸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악한 상황에서 화재 확산을 필사적으로 막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은 존경심을 자아냅니다. 성당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가시 면류관을 구하려는 노력도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면류관을 보관하는 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성당 관리인이 황급히 성당으로 향하는 장면이 화재 현장과 여러 차례 교차됩니다. 긴박감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역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영화는 실화 바탕이라는 점에서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연출과 편집 등 완성도만 놓고 보면 허점이 많습니다. 전반적으로 연출이 진부하고, 재난 영화답지 않게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소방대 간부의 계급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연출은 ‘구리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음악을 활용해 감동을 안기려는 신파적 연출도 올드합니다. 특히 감정을 이입할 만한 주인공이나 서사가 없어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 소방관 영화인 ‘온리 더 브레이브’(2017)의 경우 소방관 선후배인 ‘에릭 마쉬’(조쉬 브롤린)와 ‘브렌단 맥노도프’(마일스 텔러)의 갈등을 중심으로 서사를 이끌어가 감동을 자아냈지만, ‘노트르담 온 파이어’에선 그 정도 감동을 느끼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의 분투를 전달하는 면에선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당시 소방관들이 느꼈을 공포감이나 고립감, 답답한 심정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불길이 잡히지 않아 성당이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살과 다름없는 내부 진입 작전에 기꺼이 자원하는 소방관들의 용기와 헌신은 경이롭습니다. 화재현장을 보는 듯한 현장감도 대단한데, 장 자크 아노 감독은 대성당의 일부 공간을 본뜬 세트장을 만들고 실제로 불을 붙여 촬영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사회적 메시지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지휘체계를 확실히 정하고 첨단 소방장비를 동원하는 프랑스의 선진 소방 시스템이 인상적입니다. 현직 프랑스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이 현장을 방문하는 대목에선 통쾌한 풍자가 드러납니다. 화재 진압에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긴급상황에 고위 정치인이 찾아오는 건 방해가 될 뿐입니다. 대통령이 방문하자 소방대 간부는 브리핑을 위해 가짜 상황실을 차리고 눈속임에 나섭니다. 한국 정치인들도 주목해야 하는 장면입니다. 소방관들이 정치인에게 바라는 것은 화재 현장 방문이 아니라 처우 개선일 겁니다. 프랑스 소방관 수천 명은 2020년 ‘화재진압 수당이 경찰의 위험수당 수준에 못 미친다’며 파리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소방관들의 낮은 처우 문제는 해묵은 과제입니다. 행정안전부는 내년부터 소방공무원에게 지급되는 구조구급 활동비를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인상한다고 지난 6일 밝혔습니다. 구조구급 활동비 지급 제도가 1996년에 생겼으니 인상까지 20년이나 걸린 겁니다. 경찰에게 지급되는 ‘대민활동비’는 애초 소방의 2배인 20만 원이었습니다. 소방관 영화를 보고 나니 지난 1일 부산 동구 목욕탕에서 발생한 화재 폭발 사고로 다친 소방관들의 안위도 걱정됩니다. 이 사건으로 소방관 2명이 안면부에 2도 화상 등 중상을 입었습니다. 최근 ‘한겨레’가 기획 보도한 ‘소방관, 몸에 새겨진 재난’ 시리즈는 소방관들이 겪는 고충을 생생히 다뤘는데, 일독을 권합니다. 불철주야 국민의 안전을 위해 애쓰는 소방관들에게 새삼 감사를 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