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 시사회의 일종인 ‘P&I 스크리닝’ 첫 번째 작품 ‘1923년 9월’은 관동(간토)대지진 당시 일어난 ‘후쿠다마라 사건’을 다룹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 유언비어가 퍼졌고, 일본 경찰과 자경단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생소한 지방 사투리를 쓰는 가난한 일본 행상단 역시 조선인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후쿠다마라 사건의 발단입니다. 영화는 ‘관동대학살을 다룬 일본 영화’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정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진상조사도, 사과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연출을 맡은 모리 다츠야는 본래 다큐멘터리 감독인데, ‘1923년 9월’이 첫 번째 장편 극영화 연출작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전체적으로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흘러가지만, 그 내용과 흐름은 아주 극적입니다. 영화엔 등장인물이 많은데, 조선에서 교사로 일하던 사와다(이우라 아라타)가 사실상 주인공입니다. 사와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부인과 함께 조선을 떠나 고향인 후쿠다 마을로 돌아옵니다. “좋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는 사와다에겐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사와다는 농사를 지어보려 하지만 몸을 쓰는 일에 영 서투르고, 마을 사람들은 교사로 다시 일할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사와다의 반응은 회의적입니다. 마을 촌장 자리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친구 타무카이가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만 묵묵부답. 사와다가 세상을 등진 듯 변해버린 것은 4년 전부터입니다. 아내인 시즈코(다나카 레나)에게까지 시큰둥해 진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시즈코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중역의 딸이지만, “조선인을 속여 땅을 빼앗았다”고 인정하는 걸 보면 말이 통할 법한 사람입니다. 그런 아내에게도 사와다는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한편 사와다와 같은 기차로 마을에 돌아온 것이 있는데, 바로 전장에서 죽은 일본 병사 유키야의 유골함입니다. 유키야의 아내인 사키에(코무아이)는 과부가 됐지만, 잘생긴 마을 청년이자 뱃사공인 쿠라자(히가시데 마사히로)와의 밀회도 이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상의 인물들이 대체로 선역에 해당한다면, 이 마을 재향군인회는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맹신하는 악역입니다. 퇴역한 뒤에도 군복을 입고 으스대는가 하면, 마을 잔치 자리에서 여성을 추행합니다. 뱃사공 쿠라자가 “군대에서 아군에게 맞았다”며 군을 비판하자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되려 쿠라자를 매국노로 몰아세웁니다. 과부인 사키에와의 관계를 이유로 ‘도둑놈’이라고 욕하기도 합니다. 마을 잔치가 난장판이 된 이후 쿠라자와 사키에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집니다. 영화는 중반까지는 비교적 담담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묘한 흡입력이 있습니다. 일본 농촌의 고즈넉한 풍광과 곳곳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의 부조화가 빚는 미묘한 긴장감이 이어집니다. 전달되는 메시지도 많습니다. 전쟁이 일본 사회에 남긴 상처와 군국주의의 모순 외에도 성차별, 빈부격차 등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꼬집는 데서 감독의 노련함이 엿보입니다. 등장인물이 계속 늘어나는 점은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약 장사로 먹고 사는 천민출신 행상단과 ‘치바일보’의 정의로운 여성 기자의 서사가 마을 인물들의 이야기와 교차되면서 복잡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각 인물들의 개성과 서사가 뚜렷해 몰입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와다가 ‘4년 전’ 일을 털어놓는 장면과 관동대학살 때 한 조선인이 자경단에게 희생되는 장면은 눈을 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유언비어가 마구 확산되는 과정과 일본인의 만행에 침묵하는 언론의 민낯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종반부에 다다르면 긴장감은 극에 달합니다. 일본 행상단을 조선인으로 오해하고 광기에 휩싸여 당장 죽이려드는 마을 자경단과 이들을 뜯어말리는 선역들이 크게 충돌합니다. 여러 복선이 한꺼번에 회수되면서 긴박감도 심화합니다. 얼기설기 엮인 인물들의 서사가 갈등을 고조시키고, 관객은 이토록 많은 등장인물이 필요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치닫는 상황에서 폭발하는 명대사와 배우들의 열연이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연출이 다소 어색하거나, 급작스럽고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일부 있습니다. 신파적 연출을 자제하려 노력한 듯하지만, 일본 최초의 인권 선언인 ‘스이헤이샤 선언’까지 담아내려 한 것은 감독의 욕심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필요하다는 분명한 메시지와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또 혐오와 차별이 쌓여 광풍이 몰아치는 과정이 오늘날 우리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도 합니다. 시사점이 많은 ‘뉴 커런츠’ 부문 초청작 ‘1923년 9월’은 6일 오후 8시 첫 상영(예매코드: 097)에 이어 오는 9일 오전 9시(예매코드: 289)와 11일 오후 4시(예매코드: 475)에 관객과 만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