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5월 한국사회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팽팽히 흐르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야기됐던 긴장은 마침내 6월 민주항쟁의 봇물로 터져 나왔다. 역사의 그런 엄중한 흐름은 심심유곡 도인의 마음에까지 닿았다.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은 그해 부처님오신날(당시 5월 5일)을 맞아 묘한 법어를 발표했다.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입니다'로 시작하는 법어는 일부 성급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사탄 숭배'라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논란을 일으켰다.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지금, 다시금 성철 스님의 20년 전 법어가 현재적 의미를 지니며 주목을 받고 있다. 성철 스님의 맏상좌 천제(현 부산 해월정사 회주) 스님은 "그 같은 파격의 법어를 내린 것은 갈등과 대립이 치솟던 당시 정국에 대한 성철 스님 나름의 해법을 보인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1987년 5월은 군사정권의 탄압과 그에 따른 대중의 저항이 절정으로 치닫던 무렵이다. 마군(魔軍)이나 악마 대신 기독교적 개념인 사탄을 법어에서 언급한 것은, 군사정권의 탄압 등 제반 악과 갈등을 불교를 넘어서는 보다 넓은 틀에서 승화시키자는 의도로 파악된다. 또는 당대의 극악한 상황을 사탄에 비유하면서 그 극악한 상황마저도 '좋은 시대'를 위한 전조의 의미를 지녔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성철 스님은 법어에서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가르침과는 또 다른, 대승적인 끌어안음 혹은 보다 큰 틀에서의 적극적인 긍정으로 읽힌다.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한 채 막연한 무엇으로 답을 구하는 것도 어리석다. 천제 스님은 "해인사 장경각 법당 주련에 '원각도량하처 현금생사즉시(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라는 글귀가 있다"고 했다. '깨달음의 경지인 원각도량이 어디 있느냐? 지금 생사가 원각도량이니라'는 뜻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혹은 당대)를 떠나서 열반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일러주는 이야기다. 시대 속에서 시대를 넘어서는 무엇을 두 눈 확 뜨고 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도 법어에서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일렀다. 결국 선과 악을 초월해 지옥과 천당이 없는, 대립이 없어지고 선악이 융통하는 그런 연화의 세계를 직관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하며, 그를 위해서 부단히 수행정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럴 때 세상은 온전하게 불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악이 융화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그렇게 끝나는 성철 스님의 법어는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났지만 1987년 6월의 흥분과 감격을 잊지 않고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할 듯싶다. 감히 따르기에는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그렇다면 불경에 나오는 '빈녀(貧女)의 등(燈)'처럼 지극한 신심의 등불을 달고 부처님오신날을 봉축할밖에!
임광명기자 kmyim@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