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24) 배달겨레의 스승 노응규 의병장

입력 : 1970-01-01 09:00:00 수정 : 2009-01-11 13:08:36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의병 10여 명 주축으로 진주성 장악

1896년 음력 1월 7일, 당시만 해도 전국 4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진주관찰부가 의병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왜군을 상대로 1년 이상 버틸 정도로 내·외성이 굳건했던 진주성을 진주로부터 170리나 떨어진 '안의'(현 함양군 안의면)의 의병들이 점령했다는 소식은 일본 아사히신문에도 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안의 출신 신암(愼菴) 노응규(1861~1907) 의병장과 그의 제자인 정도현·박준필, 전 사과(司果) 임경희, 그리고 안의 장수사 승려 서재기 등 14~15명에 불과한 의병을 주축으로 진주성을 장악했으니 더욱 놀랄 사건이었다. 물론 진주향교 장의였던 한진완 등 유림의 도움이 있었지만.

노응규 의병장이 거병 직후 올린 상소도 여느 유학자나 의병장이 올렸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비록 무지한 남녀라도 차라리 죽을망정 금수가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형세가 명나라 의종(명의 마지막 황제)과 같은 운명이니, (임금은) 사직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죽고 백성은 관장(官長)을 위해 죽어야 할 것입니다."

놀랄 일은 또 있었다. 정한용 의병장이 진주 사람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켜 호응하자, 진주성을 점령한 지 불과 10여 일만에 진주로 몰려든 의병이 1만 명을 넘어섰던 것. 게다가 진주성에서 허겁지겁 달아난 관찰사와 경무관의 요청으로 급파된 대구감영의 관군마저 속수무책으로 의병들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500여 명의 의병들이 진주에서 100여 리 떨어진 의령에서 4차례 전투를 벌여 얻어온 승전보였다.

의병을 일으킨 지 1개월도 안되어 진주관찰부 관할 22군을 의병천하로 만든 진주의진은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부산 진격을 위해 김해로 별동대를 보냈다. 의병들은 김해에서 4월 11일과 12일 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4명을 살상시켰지만 의병 역시 4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진주로 철수하고 만다. 그러면서 노 의병장은 서재기와 정한용 의병장으로 하여금 각각 육십령 고개 아랫마을인 안의와 대구로 통하는 길목인 삼가에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은 선유사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의진 수뇌부는 놀라움과 당혹감에 휩싸였다. 의병을 일으키라던 밀조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국권회복의 명분을 내걸고 창의했던 노 의병장도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이 4월 19일(음력 3월 7일)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지 꼭 2개월 만이었다.

한편 노응규 의병장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 삼가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중, 부형의 비보를 듣게 된다. 진주성 의병 해산이 있던 다음날 저녁, 안의 서리(胥吏)들이 흉계로 서재기 의병장을 살해한 후 노 의병장 집을 불태웠다는 소식이었다. 이를 말리던 형(응교)은 총살되고, 부친마저 화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던 것이다. 노 의병장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울로 향하던 길을 재촉했지만 국왕이 파천한 러시아 공사관 주변에는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는 바람에 국왕에게 상소마저 올릴 수 없었다. 상소는 우여곡절 끝에 국왕에게 올라갔고, 노 의병장은 고종이 내린 비답과 묘전(墓田) 1천평, 묘지 500평으로 부형의 장례를 치르고, 초계(현 합천군 초계면)에서 제자들을 길렀다.

고종은 충의로 일어섰던 노응규·민용호·허위 등 의병장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들 모두 '독립신문'이 '비도 괴수'로 공격했던 의병장들이었다. 노응규는 규장각 주사에 배임되어 벼슬길로 나아간 뒤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 중추원의관을 거쳐 동궁시종관에 오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경계 지역인 충북 황간(현 영동군 황간면)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장차 서울로 진공해서 일제 통감부를 쳐부술 계획으로 문태서·이장춘 등 덕유산 의병부대와 합동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왜인의 밀고에 의해 충북 청산 경무분서 소속 순사들에게 의진의 장령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노 의병장은 경성경무감옥서로 이감되었는데, 옥중에서도 시종 뜻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을 당했다. 동지들이 들여주는 음식 이외에는 어떠한 관급식도 거부한 채 투옥된 지 1개월도 안된 1907년 2월 16일, 옥중에서 절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국권회복기 전·후기 의병장이자 올곧은 삶을 실천한 겨레의 스승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노 의병장 가문을 없애기 위해 가혹한 행위가 행해져 두 아들은 모두 비명으로 갔고, 노 씨 문중은 오랜 세거지인 초계를 떠나 창녕 이방면으로 옮겼다가 다시 부산·김해 등지로 옮겼으니, 노무현 대통령 증조부도 이때 김해로 왔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