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현장에서 조선인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일본인과 친분이 있거나 일본인과 뒤섞여 피폭된 조선인 중에는 병원으로 후송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대로 방치됐다.
목숨을 건진 조선인들은 감자나 오이를 갈아 붙이는 게 치료의 전부였고, 속설을 믿고 화장장에서 뼈 가루를 구해 바르는 일도 있었다고 배모(85·여·경남 합천)씨는 전했다.
조선인 사체 상당수는 방치됐다. 일본 아사히(朝日)저널은 1968년 8월 11일자 원폭 특집에서 '피폭한국인의 유골은 입을 다문 채'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는 조선인 피폭자 박수용(당시 62)씨의 증언이 실려 있다. 박씨는 미쓰비시조선소에 3천 명, 미쓰비시병기(兵器)에 4천 명이 있었는데 원폭으로 전멸했다고 말했다. 한여름이다보니 까마귀에 벌레까지 들끓었다. 이를 보다못한 일본 당국은 이사하야(諫早)형무소 간수들을 동원해 사체를 불살랐다. 장작을 놓고 그 위에 사체를 올린 뒤 다시 장작을 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당시 히로시마 에바마치 강가에서 살고 있었던 손모(85·여·합천)씨는 "원폭 후 며칠이 지나 일본 군인들이 트럭을 몰고 와서는 산 사람,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갈고리로 찍어 실어 날랐다"고 말했다. 안모(83·여·합천)씨도 "일본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중상자들까지 트럭에 실어 소각장으로 보냈다"고 증언했다.
1972년 히로미사현사-원폭자료편에 따르면 1945년 8월 21일까지 일본 군·경 등이 현장에서 소각한 사체가 3만 2천959구에 이른다. 그중 상당수는 조선인으로 추정된다.
김기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