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구재봉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서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본다. 발아래 매화 향기 그윽하게 봄을 타는 섬진강 너머엔 가는 겨울이 못내 아쉬워 눈을 이고 있는 광양 백운산~억불봉 산줄기가 선명하다.
꽃샘추위 속에 봄이 오고 있다. 이맘때 섬진강변 하동은 온통 매화 향기다. 냉큼 봄맞이에 나섰다. 군데군데 잔설이 남은 산속에도 봄은 이미 와 있었다. 생강나무는 노란 꽃잎을 터뜨렸고, 희고 붉은 매화는 일제히 봄을 알리기 시작했다. 길섶의 제비꽃도 모진 겨울을 뚫고 연보라 꽃잎을 피워냈고, 이를 시샘하듯 진달래도 성큼 꽃망울을 펼친다. 하동 구재봉(龜在峰·767.6m)에서 본 섬진강은 길게 꿈틀거리며 부지런히 봄기운을 실어 나르는 중이었다.
■봄맞이로 섬진강이 들썩
산행 들머리인 하동우체국과 하동 읍내파출소 사이 골목에서 뒤를 돌아보면 길 건너에 하동읍내시장이 보인다. 지난해 이어 올해도 '봄나물 장터'를 연다. 26~27일 이틀간이다. 꽃도 보고 입맛도 다실 생각이라면 날짜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 18일부터는 광양매화축제가 시작된다. 축제는 27일까지 이어진다. 4월 1~3일엔 화개장터 벚꽃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봄에는 섬진강도 어깨춤을 춘다.
산행 초입부터 매화향 진동 나지막한 고갯길 오르락내리락 힘들 땐 길 많아 하산 쉬워
봄기운 파릇파릇 완연한데 강 건너 산엔 아직 잔설
일부 구간 지리산 둘레길 겹쳐 막바지 길 잘 들어서야 먹점마을의 고운 매화 감상
하동 구재봉 산행은 하동우체국에서 출발하여 읍내 뒷산의 산복도로까지 올라간다. 이 길은 지리산 둘레길이다. 이어 산길 입구~하동중앙중 갈림길~흥한아파트 갈림길~바람재~375봉~옥산재~산불지대~분지봉(628m)~신촌재~596봉~흔들바위~구재봉~650봉~활공장~미점 갈림길~임도~먹점마을까지 13㎞를 6시간 40분 동안 걸었다.
이번 길은 고개를 자주 만난다. 산길에서 고갯길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준다. 고개는 말안장처럼 나지막하여 내려서면 올라가기 싫다. 대신 혹 산행이 힘든 상황이 생겼을 때 쉽게 산에서 내려올 수 있다.
하동읍 뒷산에는 이미 매화가 만발했다.
산길 초입부터 매화 향기가 진동했다. 따뜻한 남쪽 사면이라 매화의 개화 시기가 다소 이른가 보다. 이번 주말에 절정을 이룰 것은 뻔한 예견이다.
이 길은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에서 차밭길을 통해 서당 마을로 가는 하동읍~서당 코스와 한동안 함께 간다. 하동 중앙중학교에서 올라서는 등산로와 만나는 작은 고개에서 좋은 길을 따라가다가 잠시 당황했다. 농장 안으로 가는 길인데 철조망으로 막아놓았다. 능선길을 고집해야 한다.
차나무가 길 양옆에 무성하게 자라는 차밭길을 걷는다. 차밭길은 바람재까지 이어진다. 바람재 못 미쳐 흥한아파트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터 삼신지맥이다. 지리산 삼신봉에서 섬진강으로 뻗은 산줄기다.
■섬진강 너머 백운산
바람재부터 분지봉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온통 봄기운에 취해 있는데 강 너머 저 산은 흰 눈이 덮였다. 광양 백운산~억불봉으로 이어진 높은 처마 같은 능선이다. 산행하다 고개만 돌리면 백운산을 볼 수 있으니 높이 오른 보람이 있다.
산속에도 생강나무꽃이 봄을 알린다.
바람재에서 분지봉으로 가는 길에 산불이 났던 곳이 있다. 굵은 소나무들이 많이 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밑에 작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불에 탄 소나무는 그것대로, 새로 태어나 자라기 시작한 나무는 또 애틋해서 좋다. 분지봉은 섬진강 쪽을 향해 한걸음 내디딘 곳에 있었다. 산불초소가 있다. 산불감시원은 "몇 해 전 설날 즈음에 산불이 났는데 잔불을 제대로 끄지 않아 새벽에 다시 불이 붙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분지봉에는 보기에도 제법 웅장한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상석은 특이하게 원기둥 모양이었다.
분지봉 뒤쪽은 눈이 녹지 않고 제법 쌓여 있었다. 오른편으로 구재봉이 보이는데 가야 할 길은 뚝 떨어지는 고개였다. 손에 잡힐 듯 목적지가 가까웠지만 또 하나의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 비탈을 조심조심 내려서기 시작했다.
신촌재다. 제법 넓은 공터에 웬일인지 화장실이 있다. 눈에 익은 이정표가 있어 보니 지리산둘레길 이정표다. 하동의 삼화실~대축 구간으로 16.7㎞의 긴 코스다. 서당 마을을 지나온 둘레길이 신촌 마을에서 신촌재로 올라와 먹점마을로 내려가는 것이다. 구재봉 산행을 하며 둘레길을 걷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니 재미있다. 황계복 산행대장은 "구재봉을 오른 산꾼 중에 다시 신촌재로 내려와 둘레길을 따라 먹점마을로 하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고된 길 보상하는 절경
신촌재에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오르막을 부른 배로 어떻게 오를까 걱정돼 간식 하나만 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구재봉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발만 보고 묵묵하게 걸었다. 거친 숨을 길게 내쉬며 마침내 흔들바위에 도착했다. 산행대장이 바위를 밀어보았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 다시 고도를 높였다. 정상에서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들으니 무슨 공사를 하는 모양이다. 전망 좋은 바위에 퍼질러 앉았다.
굽이치는 섬진강, 늠름한 백운산, 너른 하동 들판, 그리고 하동 금오산과 남해 망운산, 여수 영취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은 조금 전의 고됨을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씻어 주었다.
진달래
너럭바위에 앉아 호사스러운 점심을 먹는다. 구재봉 정상에 있는 정자 '구재정'이 낡아 막 보수를 시작한 모양이다. 정자 밑으로 길이 나 있으니 앞으로 서너 달 이상은 조심해야겠다.
구재봉 아래도 조망이 좋았다. 움푹 팬 통시바위, 서로 마주보는 상사바위가 기이하다. 바위에 터를 잡은 소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이며 푸르다. 멀리 산이 마을을 품은 듯한 악양 들판이 보인다. 지리산 천왕봉도 그 너머 있다. 악양은 유독 들이 넓었다. 황 대장이 "옛날 인근 거지가 겨울에 들어가면 여름에 나오는 곳이 악양"이라고 소개했다.
칠성봉으로 이어지는 삼신지맥과 작별하고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쪽으로 하산한다. 길이 험하다. 650봉을 지나 활공장이다. 임도가 놓여 있다. 임도로 내려가면 한참을 돌아야 했다. 활공장을 가로질러 산길로 간다. 여기서부터 독도에 주의해야 한다. 곧장 직진하면 미점마을로 떨어진다. 매화가 고운 먹점마을로 가려면 왼쪽 능선을 따라야 한다. 아무래도 GPS 경로를 휴대전화에 내려 받아 가는 것이 좋겠다.
제비꽃
능선을 개척한다는 느낌으로 10분 정도를 내려가면 묘지가 나온다. 묘지를 지나면 임도를 다시 만난다. 이제 임도를 따른다. 하동 원조 매실 마을인 먹점엔 희고 붉은 매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